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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소년들에게 게임 밖 공동체를 만들어줘야 성평등이 가능하다"[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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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온라인에 의존하는 소년과 그렇지 않은 소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젠더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성평등을 둘러싼 젊은 세대의 성별 인식 격차가 커지는 현실에서 소년들은 어디쯤 서 있을까. 이들을 지배하는 ‘게임 문화’는 무엇을 제공할까. 2000년대 초부터 성평등 강의, 마을 교육을 해온 지현은 ‘공존’을 위해, 평화로운 공동체로 나아갈 힌트를 찾기 위해 ‘소년’에 주목했다. 소년들이 사는 세상을 들여다본 <소년문화탐방기>는 소년들을 더 안전한 감수성의 영역으로 당겨오기 위한 태도를 제시한다.

그가 교육현장에서 소년들에게 성폭력, 감수성을 가르치며 접한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을 향한 소년들의 생생한 적개심이다. “이 죽일 놈의 성교육”, “페미니즘은 개좆같아요” 따위의 말이 대표적이다. 남학생들이 으레 “페미냐”,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일이 하도 많다 보니 강사들끼리 대응법도 공유하는 상황이다. 지난해에는 여기에 ‘숏컷(짧은 머리)’을 한 여성에 대한 낙인까지 가세했다. 지현은 “괴롭힘과 공격에 시달린 강사들이 소년들에 대한 반감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아, 먼저 남성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이들에게 어떻게 폭력 예방교육, 성교육을 할 수 있을지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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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현.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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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교육이나 페미니즘을 향한 소년들의 반발심은 주로 ‘역차별론’에 기인한다. 표면적으론 청년 남성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지현이 접한 소년들의 의문, “왜 우리만 역차별당해야 하느냐”, “남성부는 왜 없느냐”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반발심에는 청년 남성의 반발심보다 한겹이 더 덧대어져 있다. 지현은 이를 “남성 청소년이 위치한 사각지대”라고 했다. “나이, 위계질서가 철저한 성인중심 한국사회에서 항상 배제되고, 양육자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약자이고 결정권 없는 수동적 입장에서 차별당한다고 인식하는데,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득권으로 불리고 잠재적 가해자로 불리는 것”이 소년들이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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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움 또한 존재한다. “제가 남성인 것이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대요.” 지현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추모집회에 다녀온 남학생에게서 이 같은 말을 들었다. 이 학생이 표현한 것은 피해자, 여성과 연대하고자 할 때 느낀 절망감이었다. 지현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남학생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들었던 이야기는, 기존에 속한 남성 친구 집단에서의 고통이었다. 여성혐오적인 친구들을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힘들어했다. 죄책감이 들어 모른 척할 수는 없고 (여성혐오를 일삼는 친구들을) 인정하는 것도 힘들어 아예 ‘페미니즘 반대’ 입장으로 돌아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게임으로 구축한 소년들의 세계



소년을 남성 시민으로 길러내는 공론장은 ‘게임’이다. 지현은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의 2차 생산물이 많고,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티 문화가 온라인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소년들의 삶이 게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 ‘일베’가 대표적인 남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였다면 요즘은 ‘에펨코리아(펨코)’가 활발히 담론을 생산한다. 에펨코리아는 온라인 축구 게임에서 시작한 커뮤니티다. 메신저 역시 카카오톡, 페이스북 메신저에 이어 음성과 화상통화를 지원하는 ‘디스코드(디코)’가 세를 얻었다. “게임이나 디코를 몰라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년들의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소년들에게 게임이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또래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통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방편이다. 탈출구인 동시에 소속감까지 제공한다. 스마트폰 확산과 더불어 게임은 ‘소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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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의존하고 중독되는 소년과 그렇지 않은 소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지현은 마을교육에 종사하면서 대안학교와 마을공동체에서 자란 소년과 그렇지 않은 소년에 주목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게임을 ‘딱 즐길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게임 외에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에서 왔다. 일반적인 청소년이 부모 외 다른 어른과 의사소통할 때 어려움을 겪는 데 반해 ‘공동체’에 속한 청소년들은 어른에 대한 거리낌이 덜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이 소년들에게 게임 밖으로 나올 출구를 제공한다. 그는 “마을 소년들에게는 게임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계속 있다. 동네 친구나 마을 어른 등이다. 어른과 위화감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이 소년들이 게임에 과몰입하지 않게 된다”고 해석했다.

문제는 이러한 ‘뒷배’가 없는 대다수의 소년이다. 대안학교나 마을공동체는 아직까지 주로 고학력, 중산층 이상이 채택하고 실천하는 담론이다. 지현은 “‘마을’이라는 것이 꼭 그런 마을운동을 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그 밖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 학교 말고도 다양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안전망이 청소년들에게 ‘온라인 밖으로의 연결고리’가 돼야 한다는 취지다. 그는 “온라인 밖에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건강한 감수성을 갖게 하는 관계가 부재한 상태에서 온라인에서만 사회화되는 것이 문제다. 뒷배가 없이 오롯이 온라인에서만 성장하게 하면 안 되고, 온라인에서 배운 것을 다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우선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PC방을 대체할 공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소년기를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끔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청소년센터가 더 재미있는 공간, 가고 싶은 곳, 학교 끝나고 가는 곳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안교육을 받지 않는 일반 청소년의 삶이 더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취지다. 가장 단순하지만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소년에게서 '공존'의 희망을 찾다



최근 몇년간 미디어에는 범죄자가 된 소년들이 많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범죄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폭력이었고, ‘엄마 몰카’, ‘선생님 몰카’ 같은 불법촬영과 ‘지인 능욕’ 같은 범죄에선 초등학생들도 가해자가 됐다. ‘지인 능욕’은 온라인 게시판이나 채팅방에 여성 지인의 사진이나 영상을 제공하고 성적인 희롱과 모욕, 음란물과의 합성을 의뢰하는 행위다. 전부 온라인을 매개로 ‘유희처럼’ 벌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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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현이 강의를 하고 있다. 충북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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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이후의 소년 담론, 교육은 어떻게 돼야 할까? 지현은 “관심을 끌고,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집단과 동료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된 소년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리라는 전제다. 그는 “건강한 감수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인 능욕 5000원에 해준다’는 선택을 내리기는 너무 쉽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교육, 타인에게 공감할 줄 아는 학습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아야 한다. 외로워서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다가 이런 사달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료를 찾아보면 1990년대부터, 즉 n번방 이전에도 소년들은 범죄에 가담하고 있었다. 미디어를 옮겨다니면서 범죄가 이어진 이유는 제대로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벌을 통해 범죄의 심각성과 잘못된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공존’의 희망을 찾을 것인가. 지현은 ‘성인 남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소년들이 성인 여성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위기의) 소년들에게 사랑을 줘야만 변화할 수 있을 텐데 그 사랑은 남성에게서 오는 사랑이어야 할 것 같다. 다정한 남성, 성별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은 남성이 소년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고 위로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제안이다. “우리는 온라인 세계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더 적극적으로, 그렇지만 묵묵히 그들의 곁에 서 있는 것으로 그들의 세상에 개입해야 한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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