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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차기 대선 경쟁

[취재파일] 탈모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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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흥행이었다. 느닷없이 대선 정국의 빅이슈로 떠오른 '탈모 공약' 이야기다. 먼저 불을 지핀 건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였다. 이 후보 측이 지난 4일, 탈모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자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큰 호응이 일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까지 참전하면서 판이 커졌다. 이 후보 측은 바로 그날 "이재명은 뽑는 게 아니라 심는 겁니다"는 내용의 14초짜리 짧은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제대로 저었다. 민주당의 장기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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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논란도 일었다. '모(毛)퓰리즘', '털퓰리즘(털+포퓰리즘)' 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원으로 탈모를 지원하는 게 합당하냐는 지적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난 2014년 동아일보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희귀난치성질환자 515명의 진료비 명세서를 분석한 결과 희귀난치성질환자들은 수술이나 입원 치료를 한 번 받을 때 비급여 진료비를 292만 원 이상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이 없어 치료 못 받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기적의 신약'으로 불리는 한 폐암 치료제는 1년 복용 비용이 1억 원에 육박한다. 당연히 건강보험은 적용되지 않는다. 2020년 우리나라 건강보험 보장률은 65.3%로 OECD 평균 80%에 크게 못 미친다. 더 급하고 위중한 질병부터 지원하는 게 맞지 않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드름 치료, 임플란트 같은 비급여 치료와 형평성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어진다.

'뜻밖의 흥행'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추진한다는 것도 아니라 검토하겠다고 한 번 '툭 던져본' 탈모 공약이 선풍적인 호응을 얻은 건 이른바 '수요층의 절실함'을 정확히 타격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천만 탈모인 시대'라는 말이 있을만큼 탈모는 흔한 현상이 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재작년 병원에서 탈모증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23만 3194명에 달한다. 탈모하면 중장년층 남성을 떠올렸지만 이제 그것도 아니다. 23만 3194명 가운데 20대는 20.7%, 30대는 22.2%로 전체의 43%를 차지했다. 13만은 남성, 10만은 여성으로 성별에 따른 차이도 크지 않았다. 남녀노소 모두의 고민이란 뜻이다.

기자의 주변에도 탈모로 고통받는 2, 30대들이 있다. 유전적 이유도 있겠지만 취업, 공부, 사회생활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큰 원인을 차지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같이 큰 불안과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연애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부터 대인기피증이 생겼다는 탄식,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를 진심으로 원망해봤다는 고백까지 기구한 사연들이 줄을 잇는다. 비싼 탈모약을 잘게 쪼개다 자괴감을 느꼈다는 경험담은 이미 흔한 이야기다. 민머리로 유명한 연예인 홍석천 씨는 한 방송에서 머리가 빠지기 시작할 무렵 인생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지난 2018년에는 한 30대 남성이 '대머리'라고 놀린 직장 동료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일도 있었다. 이재명 후보가 탈모 문제를 '신체의 불완전성'이라는 측면으로 이야기했지만 조금 잘못 짚었다. 탈모는 개인의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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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탈모약 건강보험 추진 (사진=더불어민주당 '다이너마이트' 청년선대위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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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毛)퓰리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기자는 이번 대선 정국의 '탈모 논란'이 꽤나 의미 있는 이슈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이념이나 진영이 아닌, 개인의 행복권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다. 그동안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한국 정치는 소수의 다양성이나 개인의 행복권보다는 주로 기득권의 이익이나 큰 집단의 대표된 목소리에 많이 치우쳤던 게 사실이다.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도 있긴 했지만 탈모 같은 고민은 대부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곤 했다. 기득권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정치' 속에 탈모 같은 이슈가 설 자리는 없었다. 반려견 공약 같은 생활밀착형 공약이 있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탈모 공약 논의는 정치가 방 한 구석에 쪼그려 낙담해있는 개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모(毛)퓰리즘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배경에는 '표'가 있다. 정치권이 그렇게 기민하게 움직이고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는 건 대선을 앞두고 "표가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마냥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할 순 없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는 결국 유권자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표에 미친 짓이지만, 내 표는 가져가라!'는 한 인터넷 댓글을 그저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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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는 일이다. 정치인의 약속이 공수표가 될 때는 주로 눈앞의 표만 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때다. 일부 정치인들처럼 "재원은 충분하다"고 우기기만 할 게 아니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와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건강보험 급여보다 다른 현실적인 방법도 여럿 거론된다. 안철수 후보는 복제약을 예로 들며 약값 인하를 언급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혹시 있을지 모를 업계의 담합 등 가격 결정 구조만 개선해도 약값이 많이 낮아질 거라는 의견도 나온다. 방법을 찾는 건 이제 정치인들의 몫이다. 천만 탈모인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탈모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정치는 많은 것을 바꾼다. 주 5일제가 도입된 것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생긴 것도 결국 정치가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그동안 개인의 행복보다도 지배 세력의 도그마와 그들만의 논리에 의해 움직여 온 측면이 크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 결과는 때때로 시민에게 행복보다 불행을 안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번만큼은 거대 담론보다 개인의 삶에 보다 관심을 갖고 사회 전체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치가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탈모가 아니라도 개인의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얼마든지 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도 좋다. 공약만큼은 호감일 수 있지 않은가.
강청완 기자(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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