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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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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계기로 소환된 김문수·이재오...개혁정치 꿈꿨으나 극우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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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재야 운동권, 대안 정당 창당에 실패
"YS 개혁에 한 배 타겠다" 제도 정치 입성
이재오, 계파 정치 끝 '이명박의 남자'로
김문수는 '우향우→막말→태극기 극우'
한국일보

2005년 3월 6일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반발, 4일째 단식농성 중인 전재희 의원을 찾아온 이명박(왼쪽 두 번째) 서울시장이 수도 이전에 반발한 이재오(오른쪽), 김문수(왼쪽), 이재웅 의원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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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거래도 평생 딱 한 번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진보와 관계 없어지고 팔 수 있는 경력도 없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남는 생존의 길은 김문수, 이재오와 같은 극우들의 저격수 노릇이지요.
박노자 교수 페이스북 계정에서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현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의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합류에 20일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과 교수가 내놓은 평가입니다. '극우의 저격수'.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 부위원장의 포부가 무색해지는, 비관적 전망입니다.

박 교수가 선례로 들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이재오 전 의원은 '골수 재야 운동권'이었는데요. 각각 1994년과 1995년 여당인 민주자유당(또는 신한국당)에 입당합니다. 신 부위원장의 국민의힘 합류와 가히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개혁정치 참여)는 현실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는 노선"
이재오, 1993년
"과거 고통받고 소외를 겪었던 사람일수록 지금 개혁의 의미를 크게 생각할 것"
김문수, 1994년

'문민정부의 개혁정치에 참여하겠다'는 포부를 안은 두 사람은 1996년 금배지를 달며 제도 정치권 입성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혁'과는 조금씩 먼 길을 걷게 됩니다.

'골수 재야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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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재오 전 의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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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지사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운동가였습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의 말을 빌리면, '운동권의 황태자'였죠. 1971년 교련반대 운동,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두 번 제적된 후 이듬해 청계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합니다.

한일공업(도루코)노조위원장이었던 1980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1주일 이상 고문당했고, 19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신한민주당 개헌현판식 투쟁(일명 '인천 5·3 운동') 주동자로 지목돼 1988년부터 2년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릅니다.

이 전 의원은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 3학년이던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등 유신체제에 항거하며 운동권의 길을 걸었습니다. 1979년 남민전 사건 등 군부독재 시절 5차례에 걸쳐 총 10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후 전국 재야민족민주운동 조직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습니다.

'민중당' 창당해 대안 정치 나섰으나...

한국일보

국회의원 시절의 김문수 전 경기지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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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지사와, 이 전 의원이 정치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 민중당을 창당하면서부터입니다. 전민련 내부에서 정당 추진파(반대는 운동 잔류파)가 '민중정당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민연추)로 결집하고, 민연추에서 다시 독자정당을 창당(반대는 야당 통합파)하려는 사람들이 보여 민중당을 결성합니다.

당시 민중당 사무처장이었던 이 전 의원은 "해방 이후 40년간 형성돼 온 냉전논리·분단상황 등은 정치권을 가진 자 중심으로 굴절시켜 왔다"며 "평민·민주당과의 접목은 곧바로 제도권 정당에의 흡수를 의미한다"고 독자정당 창당의 의의를 밝힙니다.

현재의 제 3지대와 유사하게 대안 정치 세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셈입니다. 그러나 1992년 3월 제 14대 총선에서 민중당 후보들은 단 한 명도 당선하지 못하며 당시 정당법에 의해 해산합니다.

개혁 포부 안고 입성했으나 계파 정치의 길로

한국일보

1991년 8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와 이재오(오른쪽) 전 의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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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껴안은 건 김영삼 당시 대통령입니다. 민주정의당 계열과 차별화를 꾀한 김 전 대통령은 "개혁에 너와 내가 없다"며 대대적인 '재야 껴안기 작업'에 나섭니다. 두 사람은 김 전 대통령의 '러브콜'을 받아들입니다.

"하의상달의 당내 민주화를 이루는 데 앞장서겠다"(김문수), "군사독재 잔재청산이 1차적 과제"(이재오)라는 다짐과 함께 두 사람은 1996년 초선 의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김 전 지사는 15대 국회 대정부질문 1위 의원(1999년 기준)으로 꼽힐 만큼 의원생활도 치열하게 합니다.

그러나 노동권이나 평화 통일 등 그들이 몸 담았던 가치를 정책에 반영하기보다는 '계파 정치'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이 전 의원이 거침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이후엔 '김 전 대통령의 의사일정에 합의해 줬다'는 이유로 같은 재야 운동권 출신인 이부영 총무와 발길질하는 활극을 벌입니다. 원내총무를 맡은 2001년엔 김대중 대통령 탄핵을 건의하거나,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 방한을 강경 반대했다가 되레 당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김 전 지사는 온건파로 분류되긴 했지만, 물밑에서 한국노총의 청와대 오찬 참석을 방해하는 등 그도 대여 투쟁에 가담했습니다. 현대의 대북자금 지원 의혹도 두 사람이 앞장서 제기했고요.

김 전 지사는 정리해고·파견근무 등 노동유연화 정책을 담은 노동관계법 개정(1996년)에 대해 "대결투쟁적인 현 노사관계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은 옳았다"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부의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고, 여당의 날치기 통과 이후 사과도 했지만 분명 아쉬운 대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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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0일 홍준표(왼쪽 두 번째)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본부 위원장 임명장 수여식에서 김무성(오른쪽 두 번째), 김문수(오른쪽), 이재오 위원장에게 임명장 수여 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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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들어서 김 전 지사와 이 전 의원은 홍준표 의원과 함께 정부 저격에 앞장섭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자금에 대한 특별검사제를 주장하거나, 땅 투기 의혹, 노건평씨의 거제 별장 의혹 등을 정조준합니다.

이들은 2004년 나란히 3선에 성공하며 이른바 '3선 3총사'로 불립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사람으로 분류됐죠. 때문에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는 수도 이전 등 당론에 반대해 비주류 '오리알 3인방'으로도 불렸습니다. 강경파 이 전 의원은 박 당시 대표를 향해 "독재자의 딸"이라거나 "정수장학회 모두 내놔야 한다"는 맹공을 서슴지 않죠.

열린우리당은 이 전 의원에 대해 "제도권에 들어온 뒤 줄곧 반개혁 노선을 걸어왔다"고 비판하긴 했으나, 아직까진 세 사람을 '중도 보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습니다.

MB 정권 실제가 된 이재오... '왕의 남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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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오른쪽) 전 대통령이 친이명박계 인사들과 송년 모임을 위해 2017년 12월 18일 오후 서울의 한 음식점으로 들어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당시 늘푸른한국당 이재오 대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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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대선에 출마하면서 이 전 의원은 본격 '왕의 남자'로 거듭납니다.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추진했고, 국정원의 '이명박 X파일' 작성 의혹을 제기합니다.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선 출마를 가닥 잡자 이명박 시장의 당선을 위해 박근혜 전 대표 측에 고개를 숙이며 최고위원까지 사퇴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 후 이 전 의원은 2008년 공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등 실세로 자리매김합니다만, 본인이 낙선합니다. 그러나 장외에서도 그의 계파 정치는 계속됐습니다. 요란하게 미국 유학을 떠나는가 하면, 미국 체류 100일 간담회까지 엽니다.

2009년 귀국한 이후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 의원으로서 재기에 성공하는가 하면 '특임장관'을 맡아 친이계 좌장 역할을 이어갑니다. '다스 실소유주 의혹'으로 이 전 대통령이 기소됐을 때도 MB 지키기에 앞장섰고, 최근엔 문재인 정부의 4대강 보 해체에 감사를 청구하는 등 그 역할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문수 경기지사 취임 후 '우향우'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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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31일 오후 경기도 수원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 개표상황실에서 김문수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 되자 활짝 웃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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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지사는 3선 후 2006년 경기지사로 취임합니다. 이후 '대수도론' 등 경기도의 양적 성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수도권 규제 완화를 해야 한다며 '친기업'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같은 당 이완구 당시 충남지사와도 연일 격돌하죠.

그의 '우향우'도 가속화됩니다.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를 보고 뼈를 깎는 연옥을 거쳐 사상전환을 했다. 당시의 좌편향에 대해 반성했다"(2006년), "식민지·분단이 없었다면 성공한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2009년), "일률적 무상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2010년), "대통령은 물러가라면서 김정은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2010년),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평생 반대했지만 이해하게 됐다"(2010년).

2010, 2011년은 각종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김 전 지사가 4, 5위를 자치했던 해입니다. 그의 행보는 보수의 지지를 얻고 과거의 진보 색채를 빼기 위한 시도로 풀이됐습니다.

그런데 '막말' 논란도 이즈음 시작됐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참사에 "한반도를 안전하게 해 주시는 하느님, 조상님께 감사드린다"(2011년)거나, "춘향전은 춘향이 X 먹으려는 것"(2011년) 등 선 넘는 발언이 잇달았습니다.

그중 희대의 사건은 2011년 12월 "나 김문수인데..."라는 자신의 전화를 장난전화로 오인한 소방관들을 인사조치한 일입니다. 거센 비난에 직면하자 인사조치를 철회하긴 했지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김문수, '극우'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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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4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인 김문수(오른쪽) 전 경기지사와 윤상현 의원이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보수단체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 참석,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김문수 비대위원측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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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보수 텃밭인 대구 수성갑에서 김부겸 현 국무총리에게 패하는 굴욕 이후 그는 제도 정치와 점점 멀어집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태극기 세력과 화학적 결합을 하고 '북한팔이'에 심취합니다. 2018년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 시절 "김정은 폭정에 대한민국을 지킬 유일한 정당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세월호 막말까지 일삼던 그는 지난해 전광훈 목사와 극우성향의 '자유통일당'을 창당했는데, 당은 두 달 뒤 조원진 대표의 자유공화당과 합당합니다.

최근엔 방역에 무신경한 모습으로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진 대상자와 돌아다니다가 "내가 국회의원 3번이나 했는데"라며 실랑이를 벌였고, 사랑제일교회 현장 예배에 참석했다 감염병예방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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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왼쪽) 전 경기지사가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검사를 위해 동행 요구를 한 경찰과 대화하는 장면. 김 전 지사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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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전향우익 분석: 북(北)에 근거한 프레임과 권력욕망'에서 김 전 지사 등의 전향을 "'북한 팔이'를 매개로 한 권력 욕망"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김 전 지사가 현실에 발 딛기보단 '보수'라는 이념에 집착했기 때문에 합리적 보수가 될 수 없었다고 진단했고요.

1985년 서노련에서 함께 활동했던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2017년 김 전 지사에 대해 "잊혀진 계절"이라는 쓸쓸한 평가를 남겼습니다. 김 전 지사가 심 후보의 배우자를 소개해 줄 정도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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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오른쪽)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20일 서울 여의도 새시대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새시대준비위 수석부위원장으로 합류한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환영식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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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윤석열 캠프에 합류한 신 부위원장이 페이스북에 남겼던 입장문으로 미뤄볼 때 그는 '제3지대'라는 이상을 좇기보단 제도 정치에 뛰어들어 차근차근 세상을 바꿔가는 게 현실적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이를 바탕으로 페미니스트로서의 비전을 실현시키겠다고 밝혔죠. 그러나 강민진 청년정의당 의원은 "얼마만큼의 당내 지위와 권한을 가질 수 있겠냐"며 우려의 시선을 보냅니다.

신 부위원장은 세간의 우려에 대해 "내부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하고 설득시키려 치열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과연 그는 '페미니스트 정치인'이란 정체성을 오롯이 지키면서 차별화된 새 정치를 선보일 수 있을까요.

윤주영 기자 roza@hankookilbo.com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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