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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High)-K'라는 반도체 용어, 혹시 들어보셨나요? 저는 올해 기사를 쓰면서 이 용어를 정말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건지 다시 돌이켜보니, 삼성전자가 공식 석상에서 High-K 메탈게이트(HKMG)라는 용어를 여러 번 활용해서인 것 같습니다. 차세대 DDR5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업계 최초로 D램에 High-K를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강조했었죠.
왠지 모르게 입에 착착 감기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는 반도체 용어. 그러면서도 느낌은 잘 안 오는 'High-K'. 이 녀석의 정체는 무엇인지, High-K 적용이 반도체 업계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High-K'의 정체를 알기 전에 반도체 트랜지스터 구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High-K를 본격적으로 알기 전에, 반도체 속에서 각종 전기 신호를 제어하는 트랜지스터(MOSFET)의 구조를 알아봅시다.
반도체 안에서는 수 억개의 트랜지스터가 열심히 일을 하죠. 트랜지스터는 전압이 트랜지스터로 들어오는 대문 역할을 하는 게이트, 이때부터 전기 알갱이(전하)를 공급하는 소스, 전하의 배출구인 드레인이 있습니다.
게이트에서 (+) 전압이 걸리면 순간적으로 소스와 드레인 사이 (-) 알갱이가 와글와글 모여 전기가 통하는 다리인 '채널'을 형성하게 됩니다. 마치 견우직녀 이야기에서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오작교 처럼요.
그럼 이제 트랜지스터 필수 요소인 절연막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바로 위 트랜지스터 그림을 보시면 게이트 바로 밑에 얇은 회색 막이 하나 보이시죠? 이게 절연막이라는 건데요.
절연막은 크게 두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로 △게이트에 전압이 걸리면 실리콘에 흩어져 있는 (-) 전하를 절연막 바로 아래로 박박 긁어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트랜지스터가 전하 알갱이를 얼마나 채울 수 있는지 가늠하는 정전 용량(Capacitance)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 알갱이가 게이트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야 합니다. '누설 전류'를 막는다고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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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절연막이 앞서 말한 정전 용량을 잘 확보하려면 크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됩니다. △막 면적이 넓을수록 좋고 △막의 두께가 얇을수록 좋고 △유전율 'K' 값이 높으면 좋습니다.(정전용량 공식)
자, 본격적인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늘 그렇듯 오늘 발생하는 문제 역시 '집적도 높이기'에서 출발합니다.
첨단 반도체 시대로 갈수록 트랜지스터 크기는 갈수록 작아지고 있습니다. 제한된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욱여 넣어 집적도를 높이기 위함인데요.
트랜지스터 크기가 줄어드는 만큼 절연막도 면적이 줄어듭니다. 따라서 더 이상 막 면적을 넓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에 두 번째 조건인 절연막 두께를 얇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됩니다. 기존 절연막 소재인 실리콘옥사이드(실리콘산화물, SiO2)의 두께를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까지 낮추는 대수술을 진행하지만, 이제 너무 막이 얇아진 나머지 게이트 밖으로 도망나가는 (-)전하 알갱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누설 전류가 심각해지면 그만큼 칩의 전력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지겠죠.
그래서 마지막 남은 세 번째 방법을 쓰게 됩니다. 절연막 구조를 있는 힘껏 바꿔봤으니 이제 최후의 수단, 유전율 K를 올릴 수 있는 소재를 찾기 시작합니다.
◇슈퍼스타 'High-K'를 소개합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High-K가 나옵니다. 높은-K. 한글로 풀면 '고유전율'이라는 뜻인데요. 유전율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여기서 유전은 한자로 '誘電' 이라고 씁니다. '꾈 유', '전기 전'입니다. 네, 우리가 유혹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유'입니다. 끌어들인다는 의미죠.
고유전율이니까, 한마디로 같은 전압을 걸어줘도 (-) 알갱이를 자기 발 밑에 더 잘 끌어들이는 녀석이라는 겁니다.
그럼 절연막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볼까요. 기본적으로 절연막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입니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 전압을 걸면, 절연막 구성 물질인 '원자'가 치즈처럼 쭉 늘어나면서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됩니다. '분극'이라고도 하죠. 늘어지는 모양이 크면 클수록 유전율이 큽니다. 많이 늘어날수록 분극이 확실해져서 실리콘에 흩어진 (-) 전하를 더 박박 긁어모을 수 있거든요.
자, 이제 업계는 기존에 한계에 다다랐던 실리콘옥사이드(SiO2) 절연막 대신 분극이 잘돼 유전율이 높은 하프늄옥사이드(HfO2) 기반 절연막을 도입합니다.
업계에 따르면 실리콘 옥사이드의 유전율(K)은 3.9입니다. 반면 하프늄옥사이드의 유전율(K)은 제조사와 성분 조합마다 다르지만 약 5배 높은 20 안팎으로 알려집니다. 똑같은 전압을 가하더라도 같은 면적과 두께라면 절연막 바로 아래에 기존보다 5배 많은 (-) 알갱이를 모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 한번 더 바꿔 말하면 High-K 절연막을 전보다 5배 더 두껍게 해도 기존과 같은 알갱이 수를 모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막이 얇아지면서 발생하는 누설 전류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거죠. 대안을 찾던 엔지니어들에겐 '신의 선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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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절연막이 High-K 물질로 바뀌면서 게이트도 기존 폴리실리콘(Poly-Silicon) 기반 게이트보다 훨씬 궁합이 좋은 메탈(금속) 기반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도 High-K 절연막 못지않은 큰 사건이었는데요. 이렇게 게이트 소재가 대폭 바뀌게 되면서 ‘HKMG’라는 게이트 계의 슈퍼 스타가 탄생한 겁니다.
참고로, High-K는 트랜지스터 외에도 전하를 모아 데이터를 저장하는 D램 캐패시터에도 활용합니다. 전하를 잡아뒀다가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이곳에서는, 전하를 잘 잡아둘 수 있는 '지르코늄옥사이드(ZrO2)'라는 고유전율 물질이 주로 쓰입니다.
◇아무리 슈퍼 스타 High-K라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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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HKMG는 반도체 양산에 도입된 지가 10년이 넘어갑니다. 최초로 이 개념을 양산에 도입한 회사는 인텔입니다. 2007년 45나노 CPU 펜린(Penryn)을 발표할 당시, 인텔이 HKMG 도입을 함께 발표하면서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폴리실리콘-실리콘옥사이드 기반 게이트 구조에 익숙했던 업계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혁신이었기 때문이죠.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를 넘어 D램에도 HKMG를 최초로 도입한 것도, 그만큼 D램 속 트랜지스터 집적도 올리기가 극한의 상황으로 도달하고 있어 채택했을 것으로 해석됩니다.
High-K 절연막 연구는 오랜 시간 지속됐지만, 업계에서는 이 절연막이 '골치 아픈 녀석'으로 통합니다. 기존 실리콘옥사이드에 비해 압도적 유전율 외엔 딱히 장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공정 문제. 실리콘 표면 성질을 열처리로 변형시켜서 만든 SiO2 절연막과 달리 High-K 절연막은 원자층증착(ALD)이라는 차세대 증착 방법으로 10나노미터 이하 두께 층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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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첨단 공정인 ALD를 적용했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변형으로 생긴 기존 막보다 실리콘과 닿은 경계 면이 훨씬 울퉁불퉁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전자 알갱이가 마치 비포장 도로를 지나가 듯 통과하기 때문에, 기존보다 전류 배달이 상대적으로 덜 원활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High-K 절연막 특성 상 도망가는 전하 알갱이가 아예 게이트 밖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절연막 사이에 끼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절연막을 파고든 가시처럼 돼 소자 성능을 불안정하게 할 바엔, 차라리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게 낫다는 업계 분석이 있습니다.
게다가 High-K 절연막도 트랜지스터 크기 축소로 두께가 점점 얇아져야 하는 숙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설 전류를 막는 능력이 SiO2보다 뛰어나지는 않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업계와 학계는 현재의 하프늄옥사이드를 대체할 수 있는 혁신적인 High-K 물질을 찾아내는 데 더욱 골몰 중입니다.
◇Low-K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High-K 물질이 있으니 반대로 Low-K 특성을 띤 친구도 있겠죠. Low가 '낮다'는 쪽의 어감이라고 해서 쓸모없는, 구시대적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유전율이 낮다는 것은 전하 알갱이를 끌어들이는 힘이 낮다는 뜻이죠. 그만큼 반도체 내에서 전기가 빠르게 이동하는 배선과 배선 사이를 채우는 부분에서는 Low-K 절연막이 상당히 유용하고, 필요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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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배선과 배선 사이에 아무런 물질을 넣지 않는 것입니다. 진공의 유전율은 1에 불과하거든요. 배선 사이에 진공만 있다면 칩 속이 마치 우리 생활에서 보는 고가도로와 같은 모양이겠죠.
하지만 반도체 회로 사이에는 무언가를 반드시 채워야 하는 특성 상, 배선의 속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저유전율의 물질이 반드시 채워져야 합니다. Low-K든 High-K든 모든 절연막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Low, High-K 절연막은 마법의 원료, 프리커서(전구체)라는 주요 소재가 반도체 장비 내에서 반응을 일으키며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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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등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사들은 막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압도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료인 프리커서 제조 기술 경쟁력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국내 업체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프랑스 에어리퀴드, 독일 머크 등 세계적인 화학 회사들이 압도적 기술을 보유, 한 개 종류의 프리커서로도 수백 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내 칩 제조사들의 관련 원료 해외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게이트용 High-K 절연막이 반도체 발전의 열쇠를 쥔 기술인만큼, 앞으로 소재의 잠재성과 성장 동력도 무궁무진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High-K 소재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고요, 쓰임새는 더 늘어날 거니까요. 투자 요인은 충분하고 우리는 세계의 연구 동향을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아직 10나노 후반 D램을 생산하는 중국 유력 반도체 업체가 HKMG 전문가를 찾고 있는 부분도 촉각을 세워야 할 부분입니다.
박태주 한양대 재료화학공학과 교수는 "인텔이 HKMG 기술을 처음 상용화한 1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가 그들의 뛰어난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몰랐지만, 지금은 세계 최정상 수준에 다다랐다"며 "이 사례는 중국 등 반도체 후발주자에게도 유사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강해령 기자 h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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