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이재명 ‘조카 변호’에 불붙은 용어 논란… “‘데이트폭력’ 표현 자체 부적절” [이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李, 조카 살인범죄 ‘데이트폭력 중범죄’로 지칭

“살인 가볍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 비판 일어

‘데이트폭력’ 표현 자체 적절성 수년째 문제 제기

전문가들 “범죄를 사랑싸움처럼 경시하게 해”

세계일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과거 자신의 조카가 벌인 모녀 살해 사건을 변호한 데 대해 사과하며 ‘교제살인’이 아닌 ‘데이트폭력 중범죄’라는 표현을 쓴 것을 두고 역풍이 거세다. 잔인한 수법으로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흉악 범죄를 연인 간 갈등에 의한 범죄 정도로 축소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를 계기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데이트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살인을 ‘데이트폭력 중범죄’로… 李 “미숙한 표현 죄송”

이 후보는 지난 26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데이트폭력이라는 말로 사건을 감추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며 다시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는 “흉악범죄로 인한 고통의 크기가 헤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며 “미숙한 표현으로 상처받으신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 전한다”고 썼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24일 SNS를 통해 경기 양주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 피해자 유가족과 만난 사실을 전하며 “제 일가(一家) 중 1인이 과거 ‘데이트폭력 중범죄’를 저질렀고, 그 가족들이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못 돼 일가 중 유일한 변호사인 제가 변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분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 후보가 언급한 사건은 2006년 발생한 ‘강동구 모녀 살인 사건’이다. 당시 이 후보의 조카 김모씨는 교제하던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자, 피해자 집에 찾아가 여자친구와 어머니를 흉기로 37차례 찔러 살해했다.

교제살인이라는 대체가능한 단어가 있음에도 데이트폭력으로만 표현한 데 대해 일각에서는 이 후보가 해당 사건을 가볍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두루뭉술한 표현을 쓴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살인을 단순히 연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 정도로 축소하려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세계일보

◆“‘데이트폭력’ 용어 범죄 경시하게 해”… 수년째 문제 제기

이 후보의 조카 교제살인 사건 표현이 논란이 된 것은 데이트폭력이라는 용어가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하기 때문이다. 학계와 여성계 등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해당 용어가 연인관계를 부각해 중대한 범죄도 사랑싸움 정도로 축소해석하게 만들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데이트폭력은 통상 연인 사이에서 발생한 물리적·비물리적 폭력을 일컫는 말로, 교제 중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교제 전후로 발생한 폭력과 위협, 성범죄 등을 폭넓게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데이트폭력이라는 말은 연인 등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한 범죄를 가볍게 보는 우리 사회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데이트 관계에서 발생한 일임을 강조하는 이 표현에는 연인 사이의 폭력을 사소한 다툼 정도로 관대하게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담겨있다”며 “뿐만 아니라 치정문제나 성격 차이 등 피해자도 연인으로서 빌미를 제공했거나 일말의 책임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부추긴다는 점도 문제”라고 말했다. 배복주 정의당 젠더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도 “데이트폭력이란 말 자체가 부적절하다. 폭력 앞에 데이트라는 단어가 붙다 보니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데이트폭력이라는 표현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세계일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으로 지칭하고 처벌 강화해야”

데이트폭력을 대체할 수 있는 용어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Violence in intimate relationship)’ 또는 ‘파트너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 등이 언급된다. 데이트폭력과 비교해 객관성이 두드러지는 용어로 해외에서는 이미 통용되고 있다.

용어를 바꾸는 것뿐 아니라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허 입법조사관은 “네덜란드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가중처벌하고 영국 양형위원회도 형량을 더 높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가해자는 의무체포 대상”이라며 “그런데 우리나라는 연인 간 폭력 문제는 수사기관이 개입을 꺼리고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는 경향이 아직도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친밀한 관계는 안전도가 높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관계를 빌미로 위험하게 만드는 건 중대하고 악질적인 범죄로 해석해야 한다”며 연인 사이를 악용한 범죄를 가중처벌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처럼 국가가 ‘너희 연인 사이니까 알아서 좋게 해결해봐’라는 태도를 보이면 방치된 피해자는 아무런 안전한 도피처 없이 혼자 고통을 감당해야 하고 심각한 결말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지원·배소영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