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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공공성 확대 연속기고③]프로크루스테스의 가면을 벗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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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 위기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원자료 분석 결과,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 소득의 몇 배인지 나타내는 10분위 배율은 정부의 재분배가 없었더라면 2020년 2분기에 19배였다. 이는 2019년 같은 기간의 14배보다 상승한 결과였다. 소득 격차가 벌어졌다. 이 배율은 2020년 3분기에도 24배로 전년 동기의 19배보다 올랐고, 올해 1분기에는 25배로 근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다른 불평등 지표도 추이가 비슷했다. 다만 재난지원금 등 재정지원 덕에 가처분소득 기준으로는 불평등 지표의 상승폭이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우리 정부의 재정지원이 가장 소극적인 편이었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남기는 이유다. 그런데 필자는 작년 말 국회에 제출된 기획재정부의 재정준칙 입법안이 더 큰 걱정이다.

경향신문

지난 8월 기재부 국가재정운용계획의 중기 재정수지 전망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부터 2025년까지 통합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제한해 2025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지 않도록 재정총량을 관리할 계획이다. 이대로라면 당장 내년부터 재정운영이 심각하게 제약된다. 경제 회복 과정의 불확실성에도 적자 3%라는 숫자를 지켜야 하는 때문이다. 변이 바이러스라도 출현해 감염 확산이 빨라지고 경제상황이 악화되면 큰일이다. 항공업, 조선업 등 기간산업 위기가 이미 진행 중이고 산업전환이 눈앞에 닥쳤어도 산업정책 역시 재정소요를 최소화해야 한다. 기재부는 침대 길이(재정건전성)에 맞춰 신체(경제)를 절단하는 신화 속 괴물 프로크루스테스가 되기로 작정했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예산안도 그 절단을 피해가지 못했다. 2022년 예산 604조4000억원은 2021년 604조9000억원보다 줄었다. 지출보다 수입의 증가율이 커 재정수지 적자도 줄어든다. 총량만 보면 그간의 확장 기조에 대한 조정이 시작되는 형국이다. 예산의 배정도 문제다. 코로나를 겪고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공공병상 비중이 OECD에서 최하위권이다. 인력도 부족하다. 그래도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예산은 없다. 상병수당은 겨우 시범사업 수준이고 요양시설과 국공립어린이집은 오히려 예산이 줄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는 지원액수가 적어 고용안전망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 작년에 제 몫을 톡톡히 한 고용유지지원금과 긴급복지지원도 예산이 삭감되었다. 전통적인 사회보험 위주의 안전망으로 보호가 어려운 비정형 플랫폼 노동에 대해서는 대책 자체가 없다. 그러면서도 예산안은 재정준칙 준수의 의지만큼은 명확히 했다.

허나 3%와 60%의 재정준칙은 더 이상 국제표준이 아니다. 실제로는 기재부가 준칙을 도입한다고 애쓰던 시기에 유럽 국가들은 반대로 그것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준칙을 우회하는 자금조달도 시도했다.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는 준칙을 ‘재정규범’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재정규범은 특정 숫자를 못 박는 옛날 방식을 버리고 정부의 재량을 인정하되 국가채무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포괄적인 책임을 부여하는 접근법이다. 한국은 국가재정법이 있어서 조금만 손을 보면 이미 상당히 엄격한 재정규범을 가진 나라가 될 수 있다. 기재부만 시대 변화에 뒤쳐진 셈이다.

지난 10월 초 기재부는 약 13억달러의 외평채를 역대 최저 금리로 발행했다. 홍보가 이어졌다. 그런데 외평채를 발행하면 외환보유고와 국가채무가 동시에 늘어난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10월말 기준 4조7000억달러, 세계 9위다. 국가채무비율 상승이 우려된다며 재정준칙을 밀어붙이던 기재부가, 이번에는 외환보유고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외평채를 발행해 국가채무비율을 스스로 끌어올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복지나 고용에 인색한 기재부는 정부가 외평채를 싼 금리로 발행하면 한국의 기업과 은행들도 외화자금을 싼 금리에 빌릴 수 있다고 둘러댄다. 한마디로 시민들의 복지나 고용에 대한 요구보다는 재정건전성이 중요하지만, 결국 대자본의 이해관계가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선다는 뜻일 테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알고 보니 고용된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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