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개국서 중동 주민 실어와 EU와 국경으로 밀어내"
"중동발 체류자 EU로 몰아내 제재에 보복" 해석…러시아 배후 의혹
폴란드와 맞닿은 벨라루스의 국경지대로 몰린 중동인들 |
(서울=연합뉴스) 송병승 기자 = '유럽 최후의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이끄는 벨라루스가 유럽연합(EU)의 제재에 맞서 '난민 공격'을 꺼내 들었다.
벨라루스는 중동지역에서 떠난 이들을 데려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EU 국경으로 몰아내면서 이들 유럽 국가가 화급히 국경을 봉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EU의 '동부 전선'에 해당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비상 상황에 EU가 혼란에 빠졌다.
EU는 벨라루스가 러시아를 포함해 10여 개국에서 항공기를 통해 고향을 떠난 중동발 체류자를 수도 민스크로 실어나르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들을 EU로 몰아내 EU에 부담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게 EU 측의 주장이다.
EU가 벨라루스에 가한 제재에 대해 보복하려고 중동인들의 이동을 방조하거나 조장했다는 것이다.
독일 외무부는 9일 "루카셴코 정권이 이주민을 폴란드 국경쪽으로 밀어냄으로써 그들을 악랄하게 이용하고 있다"라며 "루카셴코는 자신의 계산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EU를 협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폴란드가 난민 수용을 거부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라며 "우리는 싸우려는 게 아니지만 굴복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입장 차이는 폴란드 국경에 몰린 이들을 부르는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EU와 폴란드는 이들을 '이주민'(migrant)으로 부르지만 벨라루스와 러시아는 서방의 잘못된 중동 정책으로 발생한 '난민'(refugee)이라고 규정한다.
폴란드군이 벨라루스와 국경에 윤형 철조망을 설치하고 있다. |
최근 몇 개월 동안 벨라루스를 통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의 EU 국가로 입국을 시도하는 중동발 주민은 계속 증가했다.
특히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이 벨라루스와 폴란드가 맞닿은 국경을 불법으로 넘으려 한 것으로 파악됐다.
벨라루스에는 현재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1만4천 명 정도가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는 벨라루스 정부가 이들을 폴란드 쪽으로 밀어낸다고 주장하면서 군을 배치해 유입을 막고 있다.
이번 갈등은 EU와 벨라루스 간 갈등은 켜켜이 쌓인 제재의 역사가 배경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1994년부터 벨라루스를 철권 통치하는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대선에서 80% 이상의 득표율로 압승해 6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벨라루스 야당과 시위대는 부정 투표와 개표 조작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며 수개월 동안 항의시위를 벌였다.
대선 무효와 루카셴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 탄압을 이유로 EU는 루카셴코 대통령을 포함해 벨라루스 인사 88명에 대해 EU 내 자산동결과 비자발급 금지 등의 제재를 가했다.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지대에 발묶인 이라크 가족 |
2010년 벨라루스 대선에서도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야당이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야당 대선 후보를 포함한 600여 명의 야권 인사가 대거 체포됐다.
당시에도 EU와 미국 등은 선거 부정과 야권 탄압을 이유로 루카셴코 대통령과 그 측근 인사들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지난 6월엔 EU는 벨라루스 정권의 인권 침해, 시민사회 탄압, 여객기 강제 착륙 등에 대응해 새로운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경제 제재에는 벨라루스의 주요 수입원인 석유·석유화학 제품, 염화칼륨, 담배 등에 대한 거래 제한과 무기 금수 조치 등이 포함됐다.
경제 제재 이후 벨라루스를 통해 EU 국가로 유입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벨라루스는 EU의 제재에 맞서 자국 주재 EU 대표를 추방하고 EU 관계자의 입국을 금지했다.
또 EU가 옛 소련권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EU 동부 파트너십'의 참여를 중단했다.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경제제재에 이어 추가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
오랜 기간 EU는 여러 방식으로 벨라루스에 제재를 가했지만 벨라루스는 좀처럼 굽히지 않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EU와 미국 등 서방에 강경하게 맞서는 데는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지원에 힘입은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이번 국경 갈등의 배후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목했다.
그는 9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이고, 또 신제국주의적인 정책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최근 사례가 벨라루스의 공격"이라며 "루카셴코 대통령은 일선에서 러시아의 정책을 시행하는 사람이며 그 지휘자는 모스크바의 푸틴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
이번 국경 갈등에 대해 러시아는 예상대로 벨라루스를 두둔하면서 서방에 책임을 돌렸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9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를 포함한 서방이 오랜 기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상대로 추진한 정책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방은 이들 국가에 서방식 민주주의를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난민들은 벨라루스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고 유럽으로 가고 싶어한다"라며 "유럽은 스스로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카셴코 정권을 지원하는 러시아는 EU와 미국 등 서방이 벨라루스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려고 벨라루스의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서방과 냉전 이후 최악의 갈등을 겪는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서방과 대결 전선에서 '전초병'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옛 소련의 일원인 벨라루스에 재정·군사적으로 지원하며 노골적으로 루카셴코 정권을 비호해왔다.
EU가 제재만으로 벨라루스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songb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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