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전략적 자율성' 천명…미국, EU에 '구애'
동맹 복원과 전략적 협력 사이 EU 선택 주목
EU 집행위원회 본부 앞에 걸린 깃발 |
(서울=연합뉴스) 송병승 기자 = 미국이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정책을 펴면서 유럽연합(EU)이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힐 기회를 잡았다.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대립하며 패권 경쟁이 가열되는 상황이 펼쳐지자 EU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실리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안보 정책으로 서방의 안보 축인 이른바 '대서양 동맹'(미국과 유럽의 동맹)이 크게 흔들렸으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유럽을 비롯한 전통적 동맹과 관계 복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과 EU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양측의 오랜 갈등 사안이던 철강 관세 분쟁을 타결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EU의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자 EU는 위스키, 청바지 등 미국 상품에 대한 보복관세 방침으로 맞섰다.
이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이번에 전격적으로 마찰을 해소한 것이다.
양측은 또 지난 6월 항공사 보조금 분쟁에서 비롯된 보복관세 적용을 5년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최근에는 디지털세 합의를 끌어내며 EU가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추진하던 '구글세' 갈등도 일단락했다.
미국은 미국·영국·호주의 안보협력체 '오커스'(AUKUS) 출범으로 미국의 안보 정책을 불신하게 된 EU를 달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과 반목하는 호주는 오커스 참여로 핵추진 잠수함 개발에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게 됐다. 이는 앞서 호주가 프랑스 업체와 맺은 560억 달러(약 66조원) 규모의 디젤 잠수함 계약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동맹에 배신당했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항의 표시로 미국 주재 대사를 한때 불러들이기도 했다.
취임 후 두 번째 유럽 순방에 나선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가 한 일은 어설펐다. 품위 있게 처리되지 않았다"며 오커스 출범으로 인한 프랑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란 핵합의 복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정상과 회동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탈퇴로 위기에 처한 핵합의를 되살리려는 시도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
미국과 EU는 철강·알루미늄 산업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할 국제적 합의를 추진키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로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중국 같은 나라의 더러운 철강이 우리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고 철강을 덤핑해 노동자와 관련 산업, 그리고 환경에 큰 피해를 준 나라들에 맞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강·알루미늄 생산 세계 1위인 중국의 값싼 물량 공세와 이에 따른 공급과잉에 맞서기 위해 국제적 공동 전선을 펴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바이든 대통령과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새로운 '지속가능한 글로벌 철강 합의'에 협력하게 돼 기쁘다"고 화답했다.
미국이 이처럼 EU를 향해 적극적인 '구애'에 나서는 것은 중국 견제 목적뿐 아니라 EU가 미국에 의존하던 기존의 동맹외교에서 벗어나 '전략적 자율성'을 천명한 데 따른 정책적 대응으로 풀이된다.
EU는 체제가 다른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경계한다.
이 때문에 EU와 중국은 여러 차례 무역 분쟁을 빚었고 인권 문제 등 정치적 이유로 지난해 말 체결된 'EU와 중국 간 포괄적 투자협정'(CAI)도 발목이 잡혔다.
또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인권 문제와 대만 문제 등으로 EU와 중국 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국제정세에 직면한 EU는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을 줄이고 나아가 최대 교역 상대국인 중국과 경제적인 관계뿐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협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EU 깃발(좌)과 나란히 걸린 중국 오성홍기 |
중국도 미국의 군사적 압박과 대만 문제 등 외교적 갈등에 대응하는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 유럽을 중시할 필요가 생겼다.
EU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EU는 최근 잇따라 중국과 전략적 협력 확대 의사를 내비쳤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지난달 15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에서 EU의 전략적 자율성을 언급하면서 "양측은 정치 체제와 발전 모델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다자주의를 지지하며 코로나19 퇴치, 세계 경제 회복, 기후변화 대응, 지역 평화와 안정에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EU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엄수하며 대만 문제에 대한 정책을 변경한 적이 없다"며 중국을 두둔했다.
미국이 최근 대만과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EU의 이런 태도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 무조건 동조하지는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울러 중국과 전략적 측면에서도 협력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보인다.
EU의 행정부 격인 EU 집행위원회가 중국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는 것과는 달리 개별 회원국과 정당들이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EU 의회는 대만을 지지하고 인권 문제 등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상반된 입장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EU가 미국의 '동맹 복원' 움직임과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songb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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