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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직선제 개헌으로 5共 청산…‘3金’ 꺾고 대권 잡아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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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반란 성공 후 본격적 2인자 수업

“보통 사람, 믿어주세요” 메시지로 유명

여소야대로 정국불안에 ‘합당’ 승부수

재임 중 5共 청산하며 전두환과 마찰

퇴임 후 수천억 비자금 5·18진압 ‘단죄’

사면 뒤 건강 악화… 암울한 말년 보내

세계일보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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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잇는 과도기의 대통령이자 민주화 후 ’첫 군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엘리트 출신 장성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수직 상승을 거듭하다 집권 후 조기 레임덕에 빠지고 퇴임 후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을 살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에 오른 그는 1987년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를 거쳐 13대 대통령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다. 공과가 뚜렷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당 대표 시절인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도입했고,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진전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임 당시 북방외교와 통일 분야에선 혁혁한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퇴임 후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이 드러났고,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또한 적지 않다.

◆12·12쿠데타로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노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26사태 이후 그해 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환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는 쿠데타를 단행해 군부를 장악했다. 그는 당시 쿠데타의 성패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휘하 9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신군부의 군권 장악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노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들어온 시기는 1981년 7월 육군대장 진급 후 예편하면서다. 곧바로 민정당 당무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제2장관과 남북고위급회담 수석대표,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권력 2인자’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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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6·29 선언 뒤 발표

노 전 대통령은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개헌 논의를 일절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4·13 호헌 조치를 단행했다. 전두환 정권은 정권이양 계획을 밝혔지만 시민들은 민주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을 담은 시국수습 방안인 6·29 선언을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은 최초 직선제 선거로 치러진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메시지로 승부를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은 36.6%를 얻으며 민주화 진영의 호소에도 후보 단일화를 끝내 거부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28.0%)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27.0%)를 모두 누르고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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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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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 등 북방외교 성과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소련 해체와 동·서독 통일 등 대외 정세가 급변하는 와중에 러시아·중국과 수교하는 등 북방외교에 적극 나선 것은 여야를 떠나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목이다. 노태우정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90년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수교를 맺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1988년 7·7선언으로 ‘민족 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고, 다음 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에 이어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 유엔에 가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같은 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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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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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 속 5공 청산과 기습적 3당 합당

1988년 2월25일 노태우정부가 출범한 뒤 치러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들어섰다. 야당의 ‘5공화국 청산’ 요구에 노태우정부가 계속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에 열린 국회 5공 청문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폭력 진압과 전두환 정권의 비자금 등 그동안 감춰졌던 비리가 드러났지만, 광주시민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를 규명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공화당을 합치는 기습적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며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 국면으로 전환했다.

◆5000억대 비자금으로 전직 대통령 중 첫 구속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 김영삼 대표에게 대권 바통을 넘겼다. 노 전 대통령은 훗날 언론인터뷰를 통해 “김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됐다”고 회고했다.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단행(1993년)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의혹이 세상에 드러나는 단초가 됐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1995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10억원 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폭로했다. 검찰의 수사로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났고,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해 1심에서 비자금 수수와 뇌물 조성 혐의 등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되며 전직 대통령 가운데 처음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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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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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사면 이후 건강 악화, ‘현대사 진실’ 끝내 침묵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광주 5·18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비자금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거 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11종의 훈·포장을 박탈당하는 등 어두운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자신을 구속한 김영삼정부가 단행한 1997년 특별사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다.

자유의 몸을 얻었지만 이미 건강은 약해진 상황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불참할 만큼 건강은 크게 악화했다. 그는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6·29 선언의 주체, 12·12와 5·18의 진실, 3당 합당 과정, 불법 비자금의 용처 등 베일에 가린 현대사의 진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김병관, 장혜진 기자 gwan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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