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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에 구멍 난 의료장갑에 발칵···'더러운 중고품' 전 세계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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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버려진 니트릴 장갑과 PVC 장갑들. 이처럼 사용된 장갑을 수거해 새것으로 전 세계로 재판매한 태국의 불법 업체들이 확인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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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중고 니트릴 장갑이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새것으로 둔갑해 미국 등 전세계로 팔려나간 사실이 확인됐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면서 의료용·개인위생용으로 니트릴 장갑의 수요가 폭증했는데, 수익을 노린 불법 업체들이 불량 제품을 유통시켜온 것이다.

24일(현지시간) 미국 CNN 방송은 최근 몇 개월 동안 태국에서 제작된 위조 및 중고 니트릴 장갑 수천만 개가 미국으로 들어왔단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면서 미국과 태국 당국이 이에 대한 범죄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수요 폭증



니트릴 장갑은 합성 고무인 니트릴 부타디렌 라텍스(NBL)로 제작한 일회용 장갑으로, 비닐(PVC)·천연고무(라텍스)와 함께 일회용 장갑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 니트릴 장갑은 PVC보다 내구성이 높고 친환경적이며, 라텍스보다 피부 단백질 알레르기 반응이 적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주요 고객은 병원 등 의료기관이며 음식점·미용실·호텔·반도체 공장 등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최근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개인위생에 관심이 높아진 일반인의 사용까지 증가하면서 가격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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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의료진이 앰뷸런스에서 환자를 검진한 뒤 니트릴 장갑을 벗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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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수요와 달리 공급은 쉽게 늘릴 수 없는 구조다. CNN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천연 고무, 고도로 전문화된 공장, 전문적인 제조 지식이 필요하다”며 “신뢰할만한 현지 브랜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공급을 빠르게 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 틈바구니를 파고든 게 불법 업체다. 지난해 12월 태국 FDA가 니트릴 장갑 불법 제조, 사기거래 업체인 ‘패디룸’의 창고를 급습했을 때 현장에는 이미 사용해 헐렁하게 늘어난 상태의 니트릴 장갑으로 꽉 채워진 쓰레기봉투 더미가 쌓여있었다. 업체 직원들은 이 오래된 장갑을 세면대에서 수작업으로 간단히 씻고 식용색소로 염색한 뒤, ‘스리 뜨랑(Sri Trang)’이라는 브랜드가 찍힌 종이 상자에 담고 있었다. 스리 뜨랑은 태국의 유명한 장갑 제조업체인 스리뜨랑(SriTrang)의 ‘짝퉁’이다. CNN은 “확인 결과 유명회사인 스리뜨랑은 패디룸과 거래한 바 없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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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유명 니트릴장갑 제조업체인 스리뜨랑 글러브의 로고. 불법제조 업체 중 몇곳이 이 제품의 짝퉁 브랜드를 만들어 수출했다.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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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장갑, 중국·인니서 수거돼 태국서 수출



태국 FDA는 창고 소유주는 체포했지만, 패디룸을 폐쇄하는 데는 실패했다. 태국 FDA 사무차장인 수파트라 분샘은 “불법 업체는 작업 창고 한곳이 적발되면 금방 다른 지역, 다른 창고로 옮겨가 작업을 이어간다”면서 “장갑에 대한 수요가 높고 여전히 고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불법행위를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몇개월 간 10번 넘게 급습 수사를 통해 발견한 불법 장갑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고 말했다. 태국 FDA는 이 같은 막대한 양의 중고 니트릴 장갑이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거된 뒤 태국으로 들어와 재가공돼 전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개인보호장비(PPE) 전문가인 더글라스 스타인은 “현재 니트릴 장갑 업계에 사기가 만연해 있다”면서 “새것처럼 유통되는 중고 니트릴 장갑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상품”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마이애미의 사업가 타렉 키르센은 패디룸에서 200만 달러(약 23억원) 어치 니트릴 장갑을 주문해 미국 유통업체에 판매했다. 키르센은 “격분한 고객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고 말했다. 이후 두번째 컨테이너가 마이애미에 도착했을 때 키르센이 사실 확인을 위해 직접 제품 확인에 나섰다. 그는 “전부 재사용 장갑이었다. 핏자국도 있고, 제조 날짜가 2년 전으로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고 말했다. 키르센은 고객에게 전액 환불조치한 뒤 장갑을 매립하고 미 FDA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사업가 루이스 지스킨 역시 같은 사기를 당했다. 그는 270만 달러(약 32억원)을 선불로 주고 태국에서 니트릴 장갑을 구매했지만 ‘완전히 더러운 중고품’을 받았다. 아예 니트릴 장갑이 아닌 저급 라텍스 또는 비닐장갑도 섞여 있었다. 수천 개의 상자에는 짝퉁인 ‘Sri Trang’ 로고가 박혀 있었다. 지스킨은 CNN에 “양심상 도저히 그 물건을 병원에 보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토안보부(DHS)는 패디룸의 범죄 조사를 위해 지스킨의 LA창고에 쌓여있는 니트릴 장갑 7만 상자를 압수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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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릴 장갑을 착용하고 환자를 수술하고 있는 의료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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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관서 사용됐을 가능성 배제할 수 없다”



CNN은 패디룸 등 현지 불법업체와 거래한 미국 내 수입업자와 일일이 연락을 시도해, 이 중 두 명의 사업자로부터 “배송된 상품이 수준 이하였고 심지어 니트릴 장갑이 아닌 것도 있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니트릴 장갑에는 구멍이 뚫렸거나 피 얼룩이 묻어 있었고 염색이 잘못돼 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이들 중 한 사업자는 “계획상 의료기관에 니트릴 장갑을 공급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그곳에 팔 수가 없었다. 대신 미국 식품가공 공장, 호텔, 레스토랑 등에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고 밝혔다. 더글라스 스테인은 “비위생적인 재사용 장갑이 의료 종사자와 환자에게 사용됐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면서도 “불법 거래 규모를 감안할 때 짝퉁 장갑의 일부가 의료 기관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우려했다. CNN이 미국 유통업체들의 수입기록을 분석한 결과, 한 미국 사업체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패디룸에서 거의 2억 개의 장갑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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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릴 장갑을 착용한채 약을 점검하고 있는 의료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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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은 미국 당국이 이 같은 불법 거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 후 마스크·가운·장갑 등 개인보호장비 공급 부족이 심각해지자 수입 규제를 한시적으로 풀었는데, 이를 틈탄 불법 무역이 기승을 부리자 대응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보호장비 수입 규제는 아직까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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