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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에디터의 창] 꿈이 현실이 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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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1966년 방영을 시작한 미국 SF드라마 <스타트렉>에서 우주 함선 ‘엔터프라이즈호’를 몰았던 제임스 커크 선장이 아흔 살의 나이에 세트장이 아닌, 진짜 우주로 날아간 것이다. 외신의 표현대로 “공상 과학과 실제 과학의 수렴”이었다.

경향신문

정유진 국제에디터


<스타트렉>은 그 시절 미국인들에게 우주와 동의어였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76년 일명 ‘트레커’라 불리는 <스타트렉> 팬들이 미국의 첫 우주왕복선에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 40만장이 넘는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우주선 이름이 ‘컨스티튜션’에서 ‘엔터프라이즈’로 바뀌었을 정도였다.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도 열렬한 ‘트레커’ 중 한 명이었다. <스타트렉>은 훗날 그가 우주기업 블루오리진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베이조스는 수억원을 내야 탈 수 있는 블루오리진의 우주선 ‘뉴셰퍼드’에 어린 시절 영웅인 커크 선장 역의 배우 윌리엄 섀트너를 초대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베이조스 덕에 우주를 보고온 섀트너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경험이었다”며 베이조스를 얼싸안았다.

그런데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갖춘 이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배신감을 토로하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커크 선장이 <스타트렉>과 전혀 다른 성격의 미디어 프랜차이즈에서 카메오로 전락했다며 서글퍼하는 글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SF는 비현실이지만, 우리가 현실을 보는 법을 변화시킨다.” SF 칼럼니스트 심완선은 저서 <SF는 정말 끝내주는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스타트렉>이 그런 SF였다. <스타트렉>은 인류가 뛰어난 기술의 힘으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완벽히 소멸시키고 성차별, 인종차별, 민족주의를 극복해 낸 일종의 유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엔터프라이즈호의 통신 장교로 등장하는 흑인 여성 우후라가 미국 TV 역사상 최초로 백인 남성인 커크 선장과 다른 인종 간 키스를 하는 ‘비현실적인’ 설정도 가능했다.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 간 결혼이 합법화된 지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스타트렉>은 실제 NASA의 우주인 구성에 다양성을 불어넣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후라를 보며 용기를 얻은 흑인과 소수인종의 우주인 지원서가 35장에서 1000장으로 늘어나고, 여성 지원자도 16배나 급증한 것이다. 그중에는 훗날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된 샐리 라이드도 포함돼 있었다.

결국 <스타트렉>이 보여준 미래가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도 언젠가 우주에 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심어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주에도 갈 수 있을 만큼 인류가 발전한 먼 훗날 언젠가에는 우리도 빈부격차와 물질만능주의, 인종차별, 성차별을 극복해낼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스타트렉>을 보며 우주여행의 꿈을 키웠다는 베이조스의 블루오리진은 마치 <스타트렉>의 정확한 안티테제로 보인다. 섀트너가 베이조스의 손을 잡고 우주로 날아오르기 며칠 전, 블루오리진의 전직 직원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저도 <스타트렉>을 보며 성장한 팬입니다. <스타트렉>은 온 인류가 인간애로 하나 되어 우주를 탐사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하지만 저는 사내에 만연한 성차별 문화에 눈감고, 우주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 문제를 경시하는 블루오리진이 ‘페렝기’로 전락해 버린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페렝기는 <스타트렉>에서 초자본주의를 숭상하며 탐욕에 가득차 오로지 돈과 이익만 따지는 미지의 종족으로 나온다.

이 직원의 고발은 베이조스가 지난 7월 첫 우주여행에 성공했을 때 아마존 직원들이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 베이조스는 “당신들 덕분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며 자신에게 부를 쌓게 해 준 ‘아마존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아마존 노동자들은 “우리 노동력과 보너스를 착취해 모은 돈으로 우주에 갔으니 고맙기야 하겠지만, 사실 우린 그의 우주여행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감사도 필요없다”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일 뿐”이라고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말했다.

한때 우주는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우리 모두의 꿈은 (돈을 낼 수 있는 자들의) 현실이 되었다. 비현실인 <스타트렉>은 현실을 보는 법을 변화시켰지만, 블루오리진은 초자본주의적인 현실을 불변의 법칙으로 느끼게 만든다. 꿈은 자꾸만 현실이 되어가는데, 이제는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

정유진 국제에디터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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