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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관람에 각오 필요한 6시간 대작···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에 홀리다[연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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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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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피악’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담은 도스토옙스키 최후의 걸작을 현대적인 연극 언어로 되살린 작품이다. 올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6시간짜리 공연으로 선보인다.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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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선 약간의 각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단 러닝타임이 6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라는 점, 난해하고 심오한 내용에 분량까지 방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고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극장에서 이 연극을 보고 나면 이런 마음의 진입장벽 쯤은 그저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시간짜리 1부 공연을 마치고 나서는 길에 어느새 홀린 듯 2부 공연을 예매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진환 연출이 이끄는 극단 ‘피악’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담은 도스토옙스키 최후의 걸작을 현대적인 연극 언어로 되살린 작품이다. 2017년 국내 최장기 공연 시간(7시간)으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고루 받았고, 올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이번엔 6시간짜리 공연으로 다시 선보인다.

연극은 도스토옙스키(정동환)가 무대 위에 등장해 지방 소도시의 방탕한 지주 표도르 카라마조프(이기복)와 세 아들인 드미트리(주영호), 이반(한윤춘), 알료샤(김찬), 표도르의 사생아이자 하인 스메르자코프(조창원)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젊은 시절 니콜라이 1세 반란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당시 감옥에서 만난 한 청년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제정러시아 시대 시골 지주 집안인 카라마조프가에서 벌어진 친부 살해 사건과 그 재판 과정을 그린다.

연극은 노년의 도스토옙스키가 마침내 탈고한 이 소설의 이야기를 관객에 들려주는 극중극 형식이다. 소설과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극의 ‘해설자’로서 무대에 등장하는데, 연기 인생 50년 관록의 배우 정동환이 도스토옙스키뿐 아니라 조시마 장로, 대심문관, 이반의 환상 속 식객, 변호사 등 1인 5역을 맡아 연기한다. <죄와 벌> <악령> 등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비롯해 지난 5월 공연한 <단테 신곡-지옥편> 등 고전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꾸준히 선보여온 극단 피악은 총 3권, 1600여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원작 소설을 짜임새 있게 압축했다.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라도 적재적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해설자로 인해 무리 없이 극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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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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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서사시 속 ‘대심문관’을 연기하는 배우 정동환.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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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몰입감이 상당한 공연이다. 인물과 사건의 얼개를 소개하는 서사 중심의 1부 전반부를 지나면 차츰 연극적 유희들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장면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는 대심문관의 독백이다. 극중 이반의 서사시 속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대심문관이 재림 예수를 앞에 두고 자문자답하는 내용으로, 신과 인간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철학이 담겨 있다. 철학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 대목을 정동환은 25분간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쏟아내며 휘몰아치듯 격정적으로 연기한다.

2017년 초연 당시엔 대심문관이 3m 높이 구조물 위에 올라 긴 시간 독백을 했다면, 이번엔 다른 버전으로 선보인다. 초연과 지난해 10월 공연한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 이은 세 번째 버전으로, 지난 공연을 본 관객들이라면 “이 3개의 해석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나진환 연출이 전했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미니멀하지만 인물의 일그러진 내면과 본성을 표현하는 장치로 거울과 조명이 자주 사용된다. 네 개의 대형 유리벽이 무대에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데, 조명을 밖에서 비추면 거울이지만 안쪽에서 비추면 유리벽이 된다. 표도르의 둘째 아들 이반과 사생아 스메르자코프가 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장면에선 이반의 내면적 악마성을 스메르자코프에 투영하고 반사하는 도구가 된다.

1부 후반부의 암전된 무대 위,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배우들의 연기뿐 아니라 손전등과 하얀 천, 스프레이를 활용한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다. 사색적인 무신론자 이반을 연기하는 중견 배우 한윤춘의 광기어린 독백이 관객을 숨죽이게 한다. 특히 2부는 섬망증에 걸린 이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한윤춘은 온몸으로 내면의 광기를 뿜어내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반과 호흡을 맞추며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서늘한 존재감을 분출하는 스메르자코프 역 조창원의 연기도 관객을 사로잡는다. 건초와 진흙, 밀가루와 페인트를 뒤집어쓰면서도 배우들의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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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된 무대 위, 스메르자코프(왼쪽)와 이반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배우들의 연기 뿐 아니라 손전등과 스프레이를 활용한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다.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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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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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전이 지닌 힘과 함께 관객이 공연예술에서 얻고자 하는 미학적 즐거움을 모두 담고 있는 연극이다. 원작의 묵직한 주제 의식과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무대,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소설의 줄거리를 발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속도의 시대에, 장시간 공연을 올린 뚝심과 함께 연극의 쓸모를 우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부와 2부가 독립적으로 구성된 연극으로 따로 관람할 수도, 주말에는 연이어 볼 수도 있다. 긴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모든 장면 흐트러짐 없이 열연하는 배우들에게 어느 때보다 긴 박수를 보내게 된다. 서울 장충동 이해랑예술극장에서 31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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