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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최초, 최초…'美 흑인정치 개척자' 파월, 영원히 잠들다(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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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84세 일기로 별세

이데일리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AFP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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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백인 중심 미국 정가에서 잇따라 유리천장을 깬 개척자.

18일(현지시간) 별세한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은 ‘최초’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미국 흑인 정치의 선구자였다. 흑인 최초로 미국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게 그 방증이다. 아울러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 앞서 첫 흑인 대통령 물망에 올랐던 인사였다.

공화당 출신의 파월을 상징하는 또다른 수식어는 ‘온건’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아들 부시) 백악관 당시 매파 일색의 인사들 사이에서 이례적으로 비둘기파로서 자리매김한 것으로 유명하다.

CNN 등에 따르면 파월은 이날 코로나19 감염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파월의 가족은 페이스북 성명에서 “우리는 다정한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위대한 미국인을 잃었다”며 “그는 코로나19 감염 후 월터리드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잇따라 ‘흑인 최초’ 기록 쓴 개척자

파월은 1937년 뉴욕 할렘의 자메이카 이민자 부모님 밑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월은 뉴욕시립대에서 학군단(ROTC)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 참전해 훈장을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관심을 모았다. 레이건 정부 때인 1986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에 이어 1987년 국가안보보좌관 자리에 올랐고,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정부 시절인 1989년 흑인 최초이자 최연소 합참의장으로 등극했다.

그가 가장 주목 받았던 때는 걸프전이다. 1991년 합참의장으로 걸프전을 진두지휘해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걸프전 당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그 중심에는 ‘파월 독트린’이 자리했다. 가능한 한 무력 개입을 피하되 국익을 위한 개입이 불가피할 경우 압도적인 군사력을 투입해 속전속결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는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로 세계 전쟁사에서 회자될 정도다.

유명세를 탄 파월은 부시 정부 들어 또 최초 기록을 썼다. 첫 흑인 국무장관이 그것이다. 국무장관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요직 중 요직이다. 미국 정가 내에서 유색 인종에게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차별의 벽을 처음으로 깬 선구자였던 셈이다. 파월의 정치적 무게감은 이미 대권 주자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 앞서 첫 흑인 대통령 후보로 손꼽혔던 이가 파월이다.

그러나 그 역시 유리천장을 완벽하게 깨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시 정부 당시 딕 체니 전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등 ‘네오콘(신보수주의)’ 강경 매파 사이에서 파월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군인 출신이면서도 비둘기파이자 실용주의자였던 파월은 보수적인 공화당 정서에 막혀 마지막 ‘대통령’ 고지는 넘어서지 못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파월은 북핵 문제 등 주요 외교 의제에서 강경파에 가로 막혔다”며 “그의 역할은 부시 행정부의 극단적인 성향을 완화하는데 한정됐다”고 진단했다.

파월이 퇴임 후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가 오바마 전 대통령, 조 바이든 대통령 등 민주당 인사들을 지지한 것은 특유의 온건파 성향이 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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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사진 왼쪽)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사진=AFP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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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 깊숙이 관여한 한국통

파월은 한국에도 친숙한 정치인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내며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서다.

파월은 부시 정부 초기만 해도 국무장관으로서 전임 클린턴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을 지지했다. “대북 정책 기조에 변함이 없다”고 밝히면서다. 그러나 매파 일색의 부시 정부 내에서는 대북 강경 노선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고, 재임 내내 대북정책 ‘속도조절론’ 스탠스를 취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월은 특히 북한이 계속 요구했던 북미 직접 대화에는 명확히 선을 그었고, 다자주의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임관 후인 1973년부터 1년가량 한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한국통’이다. 그는 자서전 ‘나의 미국 여행’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1973년 가을부터 주한 미8군 사령부 산하 동두천에 있는 부대의 보병 대대장으로 근무했을 때가 가장 만족스러웠고 활력이 넘쳤다”고 썼다.

그의 죽음에 미국 안팎 각계각층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파월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한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대통령들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파월은 다양한 직책으로 4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파월은 인종의 장벽을 깨고 새로운 길을 열며 차세대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며 “위대한 미국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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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AFP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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