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신년회견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회자된다.
박 전 대통령은 사전에 짜인 각본대로 준비된 답변을 읽어내려갔다. 하다못해 흥미성 추가 질문이었던 퇴근 이후 사생활 관련 질문마저 사전에 조율됐다.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신년회견 |
문 대통령이 2017년 취임 후 사전질문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론과의 짜고 치기식 간담회가 국민의 알권리 증진에 해악을 끼친다는 판단이었다.
2018년 문 대통령의 첫 신년회견을 진행한 당시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새로운 문화가 정착될 것 같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전질문지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끈질기다.
언론보다는 정부 부처가 사전질문지 문화를 선호한다. 미리 질문을 파악해 준비한다면 현안에 대한 이해나 소양이 부족한 고위공직자도 말실수나 사고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일 것이다.
물론 고위공직자 본인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부하 직원들이 언론과 접촉해 사전질문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상사를 향한 과잉 충성의 발로다.
미국 뉴욕에 주재하는 한국 특파원들도 23일(현지시간)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간담회 하루 전 질문 내용을 미리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정 장관과 함께 뉴욕을 방문한 외교부 직원이 주유엔 한국대표부를 통해 특파원들에게 사전질문 취합 요구를 전달한 것이다.
특파원들이 요구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거부하자 외교부 직원은 "중간에 혼선이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사전질문지 요구가 정 장관의 지시인지, 부하 직원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지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출신인 정 장관이 대통령도 받지 않기로 한 사전질문지를 요구할 리 없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100% 확신할 수 없었다.
외교·안보 현안을 꿰뚫고 있다고 평가받는 그이지만, 말실수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전질문지 요구 시점은 미국외교협회(CFR) 초청 대담회에서 정 장관이 중국 옹호성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직후였다.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정의용 외교부장관 |
확인을 위해 서울에 있는 동료 기자를 통해 외교부에 추가 질의를 해봤다.
외교부는 아직도 관행적으로 사전질문지를 요구하는지부터 물은 뒤 관행이 아니라면 정 장관의 지시였는지, 부하 직원의 독자적인 요구였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외교부 대변인실의 답변은 "뉴욕에서 사전질문을 취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게 전달하면 감사하겠다"였다.
이미 사전질문 취합이 무산됐는데 무엇을 더 원하느냐는 식의 짜증만 느껴질 뿐 질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성의한 답변이었다.
사전질문지 요구의 문제점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이지만, 사전질문지라도 줘서 질문 취지를 이해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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