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최초 증언 올해로 30주년
법원 '日 정부 손해배상' 판결 엇갈려
한일 합의 이후 외교부도 미온적 대응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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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의사가 없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14명밖에 남지 않았다.
김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기자회견에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리고 피해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 60년이 걸렸다. 정부는 2018년부터 8월14일 ‘기림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역사 왜곡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규정해 국민의 공분을 샀고, 전 세계 곳곳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훼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11일 수요시위에서 "김학순은 일본군 성노예제의 피해자임을 당당히 밝히며 역사적 진실을 요구했고, 성폭력이 보편적 인권문제가 됐고 전시성폭력에 관한 국제법적 원칙이 세워졌다"며 "일본 정부가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사죄할 때까지 계속 요구하겠다"고 했다.
14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린 제 1500차 정기 수요시위가 강화된 거리두기로 인해 1인 시위로 진행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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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의 길은 아직도 멀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 당시 양국이 합의한 ‘한일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를 배제한 채 이뤄졌다. 일본 정부가 10억엔(약 108억원)을 출연해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해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피해에 대한 ‘배상’은 아니었다. 법적 배상 노력은 희비가 갈렸다.
지난 1월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판결에서 서울지방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4월 곽예남·김복동·이용수 할머니 등 20명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각하됐다. 국가면제 원칙을 인정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용수 할머니는 4월 판결 직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안부 문제를 제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독도 문제까지 분쟁으로 얽힐 소지가 있어 외교부도 미온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연구소 연구위원은 "법적인 판결이라는 게 역사문제를 다룰 때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며 "양국이 과거사 문제로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다 태도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법원의 판결이 다르게 나오면서 일본정부가 발뺌할 여지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안부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작업도 지지부진하다. 2017년 10월 등재 보류 결정 이후 일본이 ‘공동등재’를 추진하며 시간을 끌고 있어서다. 유네스코는 ‘상대국이 불편해하는 사안은 양국 간 대화를 거친다’는 기준을 반영한 등재절차 개편 작업에 착수했고, 일본이 소급 적용을 요구하는 상황도 우려되고 있다.
한진주 기자 truepear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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