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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시각] 불 꺼진 명동의 쓸쓸한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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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명동은 서울 중구 무교동부터 다동, 수하동, 장교동, 남산동을 비롯해 을지로, 충무로 일대까지 포함한 서울의 대표 상권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평범한 선비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남촌’이라는 이름의 주택가여서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에 일본인 거주지가 들어선 후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댔다.




명동의 명성은 이곳에 돈이 몰리면서 시작됐다. 100여년 전인 지난 1922년 이곳에 경성현물취인소가 자리 잡은 후 20세기 중반까지 명동은 ‘한국의 월스트리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은행과 증권사, 종금사 등 주요 금융사 본사가 모두 이곳에 있었다. 1979년 여의도에 새로운 증권거래소가 생기면서 증권사 및 일부 금융지주는 ‘탈(脫) 명동’했지만 아직도 하나금융지주나 한국은행은 물론 여의도에서 다시 돌아온 미래에셋증권, 대신증권 등 굵직한 금융회사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명동은 금융인들뿐 아니라 1960~1970년대에 청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남다른 장소다. 음악다방인 ‘쎄시봉’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당시 젊은이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한국포크송 문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예전에 국립극장으로 사용됐던 명동예술극장도 여기에 있어 명동은 문화·예술인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됐다. 1970년 이후에는 이곳에 자리 잡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 덕에 민주화운동의 대명사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명동거리의 풍경은 2000년대 들어 또 한 번 변했다. 외국인 관광명소로 탈바꿈하며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상권으로 변신한 것이다. 2000년대 중·후반 엔고 현상 및 한류 등의 영향으로 명동 거리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2010년대 들어서는 엔저와 한·일 관계 악화 등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빠져나가자 그 자리를 중국인이 대신 차지했다. 당시 명동의 상인들은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고자 외국어를 잘하는 점원을 고용하고, 매장 안내판을 외국어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100여년을 바쁘게 보냈던 명동이 지금은 한없이 초라한 모습이다. 공실률이 40%를 넘어설 정도로 상가가 텅텅 비어가고 있다. 서로 임대를 얻으려 했던, 목 좋은 1층 상가도 세 집 건너 한 집의 불이 꺼진 상태다. 거리 역시 평일 낮에도 행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을씨년스럽다. 여름마다 개문영업(에어컨을 틍 상태에서 가게 문을 열고 호객하는 행위) 때문에 단속 나온 공무원과 실랑이하는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다.

혹자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지나치게 기댔던 명동 상권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코로나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큰 이곳을 이렇게 쇠락하게 두는 것은 우리의 무형유산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사람들에게 명동 거리로 나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사람의 ‘삶의 터전’이자 ‘추억의 보고’인 명동이 대중의 머릿속에서 잊힐까 걱정된다.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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