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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발달장애인 상대로 휴대폰 '줄줄이 개통’···소비자 기만입니다 [장애인도 소비자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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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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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김정환씨(가명)가 휴대폰 대리점 직원이 임의로 서명한 스마트폰 개통 계약서를 보여주고 있다. 스마트폰 ‘줄줄이 개통’ 피해를 입은 김씨는 한 대리점에서 약 1년 간 4대의 스마트폰을 개통했다. 박민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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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들어와 봐요.” 2019년 3월 서울 중랑구에서 길을 걷던 발달장애인 임성섭씨(25·가명)에게 휴대폰 대리점 직원 A씨가 건넨 첫마디였다. 평소 휴대폰, 게임기 등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던 임씨는 “싼 가격에 최신 휴대폰을 개통해주겠다”는 A씨에 말에 스마트폰 개통 계약을 하게 됐다. A씨는 “고가 요금제는 3개월 후면 저렴한 요금제로 변경이 될 것”이라며 임씨에게 “휴대폰을 매번 새것으로 교체해줄 테니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을 찾아오라”고 요구했다.

2019년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사이 임씨의 명의로 총 5대의 스마트폰과 1대의 태블릿PC가 개통됐다. 대부분 10만원이 넘는 최고가 요금제에, 기기 할부는 48개월로 약정됐다. 2019년 한해 통신요금으로 약 189만원, 2020년엔 405만원, 올 상반기에만 243만원을 지출했다. 남은 기기할부금은 155만원. 2019년부터 지출한 통신요금과 기기 할부금, 위약금을 모두 합치면 1000만원 가까이에 이른다.

지난 22일 서울 중랑구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임씨는 “위약금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며 “장애인이 힘도 없고, 그러니까 인격을 무시하고 본인 마음대로 휴대폰을 바꾼 것”이라 말했다. “그땐 그 사람들이 규칙대로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부모님한테는 말하면 혼날까봐 말을 못했어요. 아버지랑 나중에 (대리점을) 찾아갔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피해를 봤다고 말했어요.”

발달장애인 김정환씨(47·가명)도 같은 대리점에서 스마트폰 ‘줄줄이 개통’ 피해를 봤다. 2019년 12월부터 올 1월까지 11만원대 최고가 요금제를 6개월 유지하는 조건으로 총 4대의 스마트폰이 개통됐다. 당시 작성된 계약서 일부에는 김씨가 아닌 대리점 직원이 임의로 서명한 문서도 포함됐다. 대리점 측은 70대인 김씨 어머니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법적인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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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임성섭씨(25)가 2019년부터 지출한 통신요금과 잔여할부금 내역. 임씨의 명의로 2019년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사이 임씨의 명의로 총 5대의 스마트폰과 1대의 태블릿PC가 개통됐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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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김정희씨(가명)가 장애인소비자피해구제상담센터에 구제 상담을 하고, 센터가 문제 해결에 나선 뒤에야 대리점은 김씨에게 지원금 명목의 환불을 약속했다. 누나 김씨는 “발달장애인의 소비할 권리를 오히려 악용해서 일부 대리점 직원들, 통신사들이 돈을 번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동생은 4~5살 수준의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제 동생이 무조건 피해자라는 게 아니에요. 절반의 죄책감과 절반의 배신감으로 가족들이 2~3년을 속앓이했어요. 장애인도 돈을 벌고, 직접 소비할 권리도 있고 이에 대한 책임도 분명 있어요. 대신 최소한 이들의 눈높이에서 상품을 설명하고, 보호자에게 제대로 된 확인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따르면 2019년 상업시설 장애인 학대 건수 51건 가운데 33건(65%)이 휴대폰 대리점에서 발생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발달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통신기기를 짧은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개통하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태블릿PC, 인터넷, 스마트워치 등을 끼워 파는 수법이다. 길 가는 이를 붙잡아 가게로 들어오게 한 뒤 ‘특정 상품에 가입하면 요금을 아낄 수 있다’는 식으로 개통을 유도하거나, 장애인의 신분증을 빼앗고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도 피해 신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심정섭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실장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7월 중순까지 센터에 제보된 통신 피해 제보는 70여건으로,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들도 비슷한 피해를 겪고 있다”며 “피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직영점을 찾아 서류를 떼는 일부터가 장애인들에겐 큰 난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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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대리점의 일탈행위라며 ‘뒷짐’을 지고 있던 통신사들은 최근 장애인 인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에 나선 뒤 속속 예방책을 마련하고 있다. 한 휴대폰 대리점이 위약금 지원 등을 광고하는 모습.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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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엔 부산 지역 장애인 12명이 이동통신사들의 부당계약행위를 지적하며 처음으로 집단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소송을 주도한 부산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따르면 발달장애인, 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부당계약 114건은 KT 대리점에서 92건(80.7%), LG유플러스 대리점에서 22건(19.2%)이 발생했다. 해당 소송은 피소된 통신사들이 계약 문제를 해결하고 위로금을 주는 방식으로 합의에 나서면서 종결됐다.

박용민 부산 장애인권익옹호기관 관장은 “피해 장애인들은 대부분 발달장애 2~3급이었다”며 “이들은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나 본인이 처한 문제 상황에 대한 이해 및 해결 능력이 취약했다. 상대방이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인 듯한 조건을 제시할 때, 본인의 이익과 불이익을 구별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을 악용해 대리점들이 편익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대리점의 일탈행위라며 ‘뒷짐’을 지고 있던 통신사들은 최근 장애인 인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에 나선 뒤 속속 예방책을 마련하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올초부터 ‘사회취약계층 고객 개통시 사전 검증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장애인 등 사회취약계층에게 정상적이지 않은 가입절차를 통해 통신 상품을 판매할 경우, 해당 대리점과 직원에게 패널티를 부과하는 제도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보호자나 후견인의 확인을 반드시 거칠 수 있도록 했다.

KT는 통신 업무에 취약한 노인, 미성년자, 장애인의 경우 가족 구성원 중 1명을 지정해 통신 업무 처리를 위임할 수 있게 하는 ‘안심 대리인 제도’를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부산 지역에서는 장애인권익옹호기관과 업무협약(MOU)을 맺고, ‘안심 대리점’을 운영하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 역시 직원 상담 교육과 함께 장애 유형에 따른 맞춤형 상담 서비스를 제공해 피해 예방과 구제 활동에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시대, 비장애인의 소비는 빠르게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있지만 장애인은 원하는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받기가 이전보다 더욱 힘들어졌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소비자로서 장애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주는데엔 인색하다. 경향신문은 이번 시리즈 기사를 통해 장애인을 복지·인권의 틀로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서 장애인이 처한 상황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또 미력하나마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기업을 조명하고, 변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짚어본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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