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0 (금)

이 여름에 놓치면 후회할 능소화 명소 3 (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진안 마이산 탑사의 암마아봉 절벽에 1만여 송이 능소화가 가득 피어나 있다.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사찰과 꽃은 어울리지 않는다. 수도승들에게 꽃이란 수행과 정진을 방해하는 악귀일 수 있다. 잡념을 불러 일으키며 속세의 유혹을 끊지 못하게 하는 번뇌의 길잡이일 수도 있다. 대저 큰 사찰, 특히 대웅전과 주변의 큰 전각 주변에는 그래서 꽃화단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요즘의 사찰에는 그런 엄격함에서 탈피하는 경향이 조금씩 엿보인다. 절이 도량(道場)이기는 하지만, 시주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하므로 점차 세속의 습성과 타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사찰에는 능소화가 자리잡은 곳들이 있다. '이 여름에 놓치면 후회할 능소화 명소'의 세번째, 마지막은 사찰에 피어난 능소화다.

진안 마이산 탑사 능소화 절벽

진안 마이산(馬耳山)은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말 귀가 쫑긋하게 돌출한 독특한 형태의 산이다. 조선시대 태종이 남행하면서 두 암봉이 나란히 솟은 형상이 마치 말의 귀와 흡사하다고 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우리 2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峰)이라 하여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속칭으로 동쪽을 숫마이봉(681.1m), 서쪽을 암마이봉(687.4m)이라고 부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뾰족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산이 동쪽 숫마이봉이고,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한 멋을 드러내는 것이 서쪽 암마이봉이다.

마이산의 입구에 들어서면 다양한 크기의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하나하나 쌓여 거대한 돌탑을 이루고 있는 탑사를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임실에 살던 이갑용(李甲用)이라는 사람이 25세 때인 1885년(고종 25)에 입산하여 이곳 은수사(銀水寺)에 머물면서 솔잎 등을 생식하며 수도하던 중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석탑을 쌓으라는 부처의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고, 10년 동안에 120여 개에 달하는 여러 형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들은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고 백 여 년의 시간을 버티고 있다. 30리 밖에서 돌을 날라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와 8진도법(八陣圖法)을 적용하여 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림으로써 돌탑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피라미드형 등 여러 모양의 탑 80여 개가 남아 있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돌로 쌓은 탑이 매우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마이산 탑사.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탑사에서 능소화를 심은 것은 1985년이다. 36년의 세월이 지나서 이제 능소화는 남부 암마이봉 절벽을 타고 35m 높이까지 자라 매년 여름 1만여 송이의 꽃을 피워내며 아름답고도 기묘한 광경을 선사한다.

이 절에서 일하는 처사에 따르면 탑사의 능소화가 이렇게 활짝 피어난 것은 3년 만의 일이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태풍 등의 영향으로 꽃이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절벽을 타고 올라가 절벽을 뒤덮은 능소화는 오직 이곳, 마이산 탑사에서 밖에 볼 수 없다. 마이산의 기이한 지형, 사찰의 돌탑과 어우러진 능소화 절벽의 풍경은 이곳이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마이산 암마이봉 절벽을 뒤덮은 능소화.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은 자신의 속살을 쉬 열어주지 않는다. 마이산 입구에서 탑사까지 가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2km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왕복 10리 길의 땀을 한바탕 흘리고 나서야 이 귀한 광경을 볼 수 있으나,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능소화 절벽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쯤 걷는 일이 대수겠는가.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돌부처, 석등과 어우러진 능소화 절벽.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구례 화엄사 위풍당당 능소화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남서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 고구려 안원왕 14년)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7년(신라 문무왕 17)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가 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화엄사 관람은 매우 쉽다. 주차장에서 산문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음식점이나 관광용품 파는 상점들은 저 밑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산문 앞이 번잡하지도 않다. 산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으로 가는 돌 계단이 나오는데, 그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높게 솟은 능소화가 가장 먼저 반겨준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높게 솟은 화엄사 능소화.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능소화는 너무 높게 치솟아있어서 하늘을 넘본다는 능소화 명칭의 유래와 딱 어울린다. 마치 능소화로 이루어진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참 이색적이 풍경이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화엄사 능소화는 마치 꽃으로 장식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느낌을 준다.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사의 능소화는 딱 이것 뿐이다. 여기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없다. 앞에서 말했듯, 좀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대웅전이나 각황전 등의 가람 주변에는 일체의 꽃 화단이 배제돼 있다. 그야말로 화엄의 대사찰답게 전통적인 사찰 조경의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나 홀로 고고하게 일당백의 위용을 자랑하는 화엄사 능소화.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능소화는 가히 일당백의 위세를 자랑한다. 나 하나면 되지 다른 잡것들이 왜 필요하느냐고 외치는 양, 고고하게 서 있는 능소화는 그래서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의 대도량을 이룬 화엄사 그 자체의 상징인듯도 하다.

양산 통도사 장독대 능소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소위 '영남 알프스' 산행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불법을 널리 전했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후 이 절은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경내의 가람들은 대웅전과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극락보전(極樂寶殿) 외에 12개의 법당과 보광전(普光殿)·감로당(甘露堂) 외에 6방(房) 등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이므로, 이를 들러보는데만 하루가 걸린다.

그러나 능소화를 보려면 이 곳을 몽땅 통과해 맨 위에 있는 암자인 서운암(瑞雲庵)으로 직행하면 된다. 통도사에 있는 13개 암자의 하나인 서운암은 사도세자가 직접 짓고 쓴 「동궁어필(東宮御筆)」, 영조 19년(1743) 3월 17일 관례를 치루는 사도세자를 위해 영조가 전달 그믐 2월 30일에 짓고 쓴 「훈유어필(訓諭御筆)」 을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을 취미로 하는 애호가 사이에서 서운암은 출사의 명당이다. 서운암은 봄이면 암자를 둘러싼 20만여 평의 산자락에 피어나는 야생화가 무려 100여 종에 이르는 '꽃암자'가 된다. 특히 금낭화 군락지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황매화가 유명하다. 또 여름이면 능소화가 동호인들을 끌어모은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서운암 장독대와 어우러진 능소화.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운암 된장은 알아주는 명품인데, 이를 담기 위한 대규모 장독대가 암자 뒷편으로 늘어서 있어서 이를 배경으로 한 능소화가 색다를 정취를 안겨준다. 생약재를 첨가해 담근 서운암의 재래식 된장은 양산시의 특산품으로 지정, '된장암자'로 불리기도 한다. 명물로 꼽는 항아리들은 서운암 성파스님이 10년 가까이 정성들여 모은 소중한 수집품이다. '신분제가 있었던 시절에도 왕족이나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똑같이 사용했던 게 장독이니 우리에게 이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것이 성파스님의 항아리 수집에 대한 마음이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명품으로 유명한 서운암 된장이 익어가는 장독대와 능소화.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운암을 찾을 때 주의할 점은 차를 가져오지 않았을 경우, 통도사 입구에서 서운암까지 2.5km가 넘는 길을 걸어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로 왔다면 통도사 옆 길을 통해 서운암까지 바로 직행할 수 있다.

뉴스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능소화는 서운암 연등과도 잘 어울린다. 2021.07.23 digibobos@newspim.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digibobos@newspim.com

저작권자(c) 글로벌리더의 지름길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Newspim),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