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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신작로 공사한다며 집집마다 캐간 돌, 백제 성벽이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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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해 폭우로 일부가 무너진 충남 부여군 나성. 가장 오래된 나성 중 하나지만 겉에서 보기엔 완만한 구릉 형태인 곳이 많다. 최근 나성의 북쪽 문으로 추정되는 지점이 발견됐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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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현재의 부여)에서 강으로 나가는 성문이 새롭게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13일 “부여 나성 10차 발굴조사에서 나성의 북쪽 문이 있었던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나성의 성문은 총 5개로 추정되는데, 부소산과 금강 어귀를 잇는 북쪽 구역에서는 이번이 첫 발견이다. 그간 내륙에 위치한 나성 동쪽 구역에서는 문 두 개의 흔적을 발견한 바 있다.



수도 이전하며 외곽성 두른 계획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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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비)는 서쪽과 남쪽은 강으로, 동쪽과 북쪽은 나성을 쌓아 도시를 보호했다. 자료 백제고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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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둘러싸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외곽성이다. 538년 천도로 백제의 세 번째 수도가 된 사비는 서쪽과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금강(백마강)과 동쪽‧북쪽에 쌓은 성벽으로 도시를 보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부여군과 재단법인 백제고도문화재단이 진행했다. 발굴조사단은 지난 3월부터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중, 돌로 된 성벽이 직선으로 이어지다 약 107°의 각도로 둥글게 꺾어지는 부분을 발견하고 ‘성문’ 이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앞서 1998년 발견된 동나성 3문지와도 같은 형태였다.



성문 기대하고 팠는데 대형 수로… 성벽 쓸어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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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성의 북문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모습. 직선으로 이어지던 돌벽이 107도 각도로 둥글게 꺾어진다. 앞서 발견된 나성 동문의 형태와도 같다. 조사단은 반대쪽 성문을 발견하려고 2m 깊이로 땅을 넓게 팠지만, 수로만 발견되고 성벽을 발견하지 못했다. 수로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성벽의 돌들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백제고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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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성문의 너비는 10m가 채 되지 않는다. 조사단은 반대쪽에 이어지는 성벽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맞은편에 깊고 넓게 구덩이를 넓게 팠지만 성벽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예상치 못한 거대 수로가 발견됐다. 수로 바닥에서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다. 백제문화재단 성현화 조사팀장은 “조사 지점이 지대가 약간 낮은데, 이 수로는 마을 전체의 물이 모여드는 엄청 큰 수로로 추정된다”며 “조선시대 이후 이 수로로 많은 물이 흐르면서 남아있던 성벽의 돌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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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 동2문의 흔적. 성문 폭은 5m다. 백제고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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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북포 쪽에서 놀이를 했다'는 곳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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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북문이 발견된 자리는 낙화암과 가깝고, 인근 하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 근처다. 자료 백제고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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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금강으로 합류하는 가증천 하구 어귀로, 낙화암과도 인접해있다. 삼국사기에 ‘(백제)무왕이 북포 쪽에서 놀이를 했다’ 등의 기록으로 보아 포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와도 가깝다. 나성의 여러 문 중 물길과 가장 가까운 문인 셈이다.

백제왕도추진단 송길상 연구관은 “사비는 금강이 둘러싸고 있는 데다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 터라 분명 강을 통한 물류가 있었을 텐데, 그간 찾지 못했던 수상 물류 통로의 흔적을 유추해볼 수 있는 첫 발견”이라고 설명했다. 송길상 연구관은 “이번에 발견된 북문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할 때부터 외곽에 성을 둘러쳐 도시를 보호하는 것까지 설계한 ‘계획도시’였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새마을운동 이후…제방 만드느라 흙에 뒤덮인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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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까지 구불구불한 천이 이어지던 자리에, 새마을운동 이후 일직선의 수로가 생기면서 제방도 같이 생겼다. 자료 백제고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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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 지역의 성벽은 평지에 흙을 쌓아 지면을 높인 뒤 돌을 쌓아 덧댄 형태다. 석벽을 약 3m 정도 높이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1m 남짓이다.

이번에 발견된 나성 북문의 흔적도 돌로 쌓은 4단, 약 120㎝ 높이다. 돌로 된 석축 위쪽으로 흙이 80㎝ 정도 덮인 채로 발견됐다. 성현화 조사팀장은 “백제시대의 부여는 지금보다 지대가 약 3m 정도 낮았다”며 “이후 가증천이 범람할 때마다 흙이 쌓이기도 하고, 제방으로 쓰기 위해 보수를 하면서 흙이 성벽 위로 덮였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남은 돌, 신작로 공사에 쓰려 주워갔다



1947년부터 찍힌 항공사진을 보면 북성문 일대는 지대가 낮고, 구불구불한 뱀 모양 물길이 통과하는 지형이다. 그러나 1967년도에 직선으로 수로 공사를 하면서 일대 지형이 직선으로 바뀐다. 성 팀장은 “이번에 북문이 발견된 지점도 도로 지번”이라며 “수로 옆에는 항상 도로가 붙어있는데, 원래 도로로 이용하다가 새마을운동 시기 형질변경을 하면서 제방으로 변경하며 지금까지 제방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60년대까지 일부 드러나 있던 돌벽도 새마을운동 시기 신작로 공사에 동원됐을 가능성이 크다. 성 팀장은 “바로 옆 뒷개마을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 ‘신작로 공사를 할 테니 집집마다 돌을 구해오라’는 할당량이 있어서, 그걸 채우려고 성돌을 캐다가 냈다는 얘기를 왕왕하신다”며 “다른 지역 산성에서도 개발 시기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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