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공로자 한송희 소령, 진료 기록 살펴보다 단서 포착
"국방부 전문 인력 큰 역할"
환자 기록 찾는 국방부 5·18진상조사지원단 한송희 소령 |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여기에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대낮에도 손전등을 켜야 할 정도로 음습한 광주 옛 적십자병원을 찾은 국방부 5·18 진상조사지원단 의무담당 지원관(간호장교) 한송희(42) 소령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읊조렸다.
병원은 2014년 문을 닫은 뒤 방치된 탓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한 소령은 말을 마치자마자 의무기록실 한쪽에서 환자 이름별로 차곡차곡 정리된 수천 장의 '환자 카드'를 찾아냈다.
그리곤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카드를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환자 카드를 찾으면 환자 번호를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럼 의료 기록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함이었다.
서랍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먼지 쌓인 방대한 기록지와 암호 같은 번호를 앞에 두고 막막해하던 조사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자 카드를 찾는 데 손을 보탰다.
환자 기록 찾는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
이들이 찾는 이는 41년간 이름 없는 시신으로 남아있다가 최근 신원이 확인된 고(故) 신동남 씨의 구체적인 진료 기록.
신씨는 5·18 당시 총상을 입고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숨진 희생자로 밝혀졌다.
신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한 소령의 역할이 컸다.
적십자병원 진료비 청구서를 확인하고 있던 한 소령은 기록상 의료 처치와 투입 약물 등을 근거로 '심복남'(신동남의 오기) 환자가 개복 수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수술 이후에 당연히 이어져야 할 의료 행위는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적십자병원이 작성한 사망자(Expire) 명단에서도 심복남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사망한 것이 분명한 심복남이라는 환자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추적할 단서는 더는 남아있지 않은 상황.
한 소령은 문득 개복 수술 흔적이 발견된 시신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그가 수없이 뒤적였던 검찰의 사망자 검시 조서였다.
서둘러 다시 확인한 검시 기록에는 "(복부) 정중선을 따라 20㎝의 수술 흔이 인정되고, 하복부는 장관이 유출돼 외부로 나와 있음"이라고 적혀있었다.
'수술 흔적' 이금영의 사망진단서 |
다만 이 시신은 '이금영'이라는 이름으로 검시가 이뤄졌는데 한달 뒤 이름이 지워지고 신원미상 시신으로 재분류됐다.
기록으론 심복남과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이젠 이금영을 찾아나서 경위를 확인해보니 그는 살아돌아온 생존자였다.
그의 어머니가 연락이 두절된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전남도청에 안치돼 있는 신씨의 시신을 아들로 착각하고 장례를 치른 것이었다.
이씨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시신은 무명 열사로 남겨져 있었다.
한편 조사위는 행방불명자 신청 기록에서 심복만과 유사한 피해를 진술한 '신동남' 가족들의 증언을 확인했다.
조사위는 적십자병원의 기록(심복만)과 검찰의 검시 조서(이금영), 행불자 신청 서류(신동남)에 남겨진 흔적이 모두 동일인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행불자 신청 자료를 단서로 가족들을 찾아나선 조사위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신씨의 신원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소령은 "진실의 조각은 파편처럼 각각 동떨어져 있었고, 급히 작성된 기록들엔 오류도 많았다"며 "그것을 서로 연결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져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조사위를 도와 제가 맡은 의료 담당 지원 업무를 했을 뿐"이라며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국방부 지원단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송선태 조사위원장 역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간담회에서 "국방부에서 지원해 준 분야별 전문 인력이 큰 힘이 됐다"며 "앞으로도 이런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아 남은 행방불명자를 찾는 데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41년간 무명열사였던 묘에 절하는 유가족 |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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