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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이상직 변호사의 AI 법률사무소](24)명나라 해서(海瑞)와 AI시대 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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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가정제(嘉靖帝) 시절 해서(海瑞)는 과거 낙방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지방관리로 벼슬길에 들어섰고, 청렴·강직함을 인정받아 중앙관리로 천거됐다. 관리로 입문하자마자 황제의 사치향락과 무능을 탓하며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가정제가 정치를 못한 탓에 백성이 가난해서 집이 깨끗(家淨)하다는 '아재개그'를 섞어 비판했다. 격분한 가정제는 해서를 처형하려 했지만 폭군이라는 이름을 남기기 싫어 그만뒀다.

해서는 30여년 공직생활 가운데 절반을 직위해제, 귀양 등 상태로 있었다. 좌천과 승진을 거듭했으며, 지위가 높지만 할 일 없는 승진성 좌천을 겪기도 했다. 어떤 관직에 있든지 법령 시행이 엄격했으며, 공사(公私)가 분명했다. 한번은 지방호족이 빼앗은 땅을 백성에게 돌려줬다. 그 호족 가운데에는 가정제 시절 해서의 처형을 반대한 재상 서계(徐階)도 있었다. 일중독에 더해 효자인 탓에 가정생활은 불우했고, 욕을 많이 먹어 그런지 70살이 넘게 살았다. 죽을 때까지 청빈해서 장례 치를 돈도 없었다. 해서를 비판하면 나쁜 관리요, 두둔하면 좋은 관리라는 공식이 생겼다. 해서는 과연 옳은가. 인공지능(AI) 시대에 공직자도 해서와 같이 그러해야 하는가. 먼저 해서가 살던 시대와 AI 시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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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가 살던 시대는 농업 중심 사회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많이 가진 자가 부자이고, 땅이 없으면 종속된 삶을 살게 된다. 땅을 합리적으로 나누고, 공정한 거래 기준을 만들며, 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관리의 주된 업무다. 그런데 상공업을 천시하는 농업 중심 국가의 정부 곳간은 가난하다. 중앙·지방 할 것 없이 관리가 박봉에 시달리니 뇌물을 받고 나랏일의 공정을 잃는 구조적 부패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은 상공업 중심 산업사회다. 그것도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정보통신, 온라인 기반의 빅데이터, AI 등 4차 산업혁명으로 빠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부가 쌓이고 있고, 공무원도 박봉에 시달리지 않는다.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 있다. 구조적 부패는 '거의' 없어졌다. 기존 법령의 공정한 시행에 더해 부당한 옛 규제를 걷어내고 새로운 산업을 진흥하는 업무가 중요해졌다. 신산업 등장에 따라 기존 이해관계와의 복잡·다양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책무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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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공무원은 어느 정도 청렴해야 하는가. 공직자로 근무하는 기간에 엄격한 청렴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민간에 있던 활동 기간까지 엄격한 준법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 국회에서 너무 많은 법을 만들어서 법 위반 없이 유리알처럼 깨끗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파렴치범이나 진출하고자 하는 공직 수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법 행위 정도로 검증 범위를 줄여야 한다. 국회청문회가 도입된 이후 국민들의 기억에 남는 장관 등 정무직은 몇 몇이었는가. 실력 있는 사람이 공직에 와야 하고, 공직에 있는 동안 개인적 탐욕을 국가 발전을 위해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성장 사회에서 정의·공정이 중요해지면서 계층 간 갈등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화가 젊은이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다는 논란이 있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국민이 서로 상처(Injury)를 주는 것을 막는 것이 좋은 정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경제성장기에는 국민에게 나눌 자원이 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 간 갈등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침체되면서 배분할 자원이 상대적으로 줄고 있다. 국가가 가진 자원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원칙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이 공무원의 중요한 역량이 되고 있다. AI 시대에는 산업진흥, 규제타파, 갈등조정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키워서 혜택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 공무원의 주된 역할이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바로 AI 시대의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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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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