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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장관의 '비핵화 정의' 오락가락...침묵만 지키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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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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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외교부 장관(가운데)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25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대통령 방미 성과를 발표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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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지난 25일 한·미 정상회담 성과 설명 브리핑에서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와 우리 정부가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차이가 없다”고 발언한 이후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북핵 문제 핵심 쟁점에 대해 북한의 주장이 맞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 비핵화’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모두 북핵 문제의 최종 해결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규정하는 용어다. 공식용어는 한반도비핵화이지만, 이것은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는 미국과 ‘북핵 뿐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도 함께 제거되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절충한 외교적 타협이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의 해석 차이는 그 안에 (미국의) 핵위협 제거가 포함되는지 여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문제는 향후 북핵 협상이 재개된다면 가장 중요한 핵심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본질적 문제다. 북한의 핵무기를 먼저 제거하고 그 다음에 안보환경을 바꾸는 순서를 택할지, 동시병행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등을 협상을 통해 합의해야 한다. 이 문제는 핵협상이 진행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였지만 협상이 중단되면서 아직까지 서로의 주장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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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위협 제거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전략무기 등도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군 철수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곧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반도 비핵지대화의 유래와 의미

한반도 비핵지대화의 원조는 1950년대 소련이 대만·일본·한국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세운 ‘아시아·태평양지역 비핵지대 창설’ 주장이다. 북한과 당시 핵무기가 없던 중국도 이에 호응했다. 북한이 이 개념을 발전시켜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한·미가 시작한 팀스피리트 훈련에 북한이 큰 위협을 느낀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은 이 훈련에 핵무기 운용과 관련된 사전 연습이 포함돼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주한 미군이 배치한 핵무기 철수와 함께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2월 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조선반도를 영원한 비핵평화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엔에 한반도 비핵지대화 창설을 정식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요구하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한반도를 핵무기·핵기지가 없는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이 내놓은 한반도 비핵지대화의 내용은 한반도 내에 핵무기를 실험하거나 제조·반입·저장하는 것은 물론 한국 내 미국의 핵기지 설치, 외국 핵무기의 한반도 영공·영해 통과 등도 금지하는 엄격한 조건을 담고 있었다.

■핵보유 선언과 함께 핵위협 제거 요구

북한은 북핵 6자회담이 한참 진행중이던 2005년 느닷없이 핵보유 선언을 하고 ‘미국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핵을 보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핵폐기의 조건으로 ‘미국의 핵위협 청산’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6자회담 참가국이 그해 만든 9·19 공동선언에는 미국의 핵위협 제거를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과 북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이 맞서 결국 ‘한반도 비핵화’라는 서로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한 표현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북한은 2016년 7월 6일 정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공개한 한반도 비핵화 5대 조건을 제시했다. △남한 내 미군 기지의 핵무기 공개 △남한 내 모든 핵무기와 핵기지 철폐 및 검증 △미국의 핵전력 한반도 전개 금지 약속 △북한에 대한 핵위협 중단 및 핵 불사용 확약 △한반도에서 핵 사용권을 가진 미군의 철수 등이다.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북한은 또 외무성 영문 홈페이지에 소개한 2018년 남북 판문점선언 영문 버전에서 합의문에 나오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바꾸는 것’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핵위협 없는 한반도’ 명시한 평양공동선언

2018년 9월 남북 정상이 서명한 9·19 평양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개념 속에 핵위협 제거가 포함된다는 것을 명시한 최초의 남북 간 합의문이다. 선언문에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는 문장이 포함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또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 시민들 앞에서 “우리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다“고 밝혔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의 다른 요소들에 묻혀 이 부분은 주목받지 않았지만, 한국이 북한과 ‘핵위협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이 명시된 합의문에 서명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이 그동안 유지했던 ‘한·미 공동의 한반도 비핵화 정의’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북한의 한반도 비핵지대화 개념에 한 발 다가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해 12월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인식’을 논박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란 우리의 핵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라고 주장했다. 곧 열릴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핵무기뿐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도 한반도 비핵화의 대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북핵 핵심쟁점에 외교장관이 오락가락 ...“확실한 정리 필요”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정의용 장관의 발언은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북한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한국 정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논란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정 장관은 한반도 비핵화에 핵위협 제거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도 한 적이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 장관은 지난 20일 미국 PBS 방송 인터뷰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를 묻는 앵커의 질문에 1992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매우 명확한 정의이며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의 정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비핵화공동선언에는 ‘핵위협’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정 장관의 이 말은 한반도 비핵화 개념 속에 핵위협 제거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는 불과 5일 뒤 브리핑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지대화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해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더욱이 정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언급도 함께 남겼다. “한반도 비핵화가 1992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부터 사용했던 용어이고,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한반도 비핵화 의미를 분명히 했다”고 말한 것이다. 비핵화공동선언에는 핵위협 제거의 개념이 없고, 판문점선언에는 ‘핵없는 한반도’라는 애매한 표현이 들어가 있으며, 평양공동선언에는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3가지를 뭉뚱그려 언급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한 것이다.

북핵 당사국의 외교장관이 북핵 문제 핵심쟁점에 대해 이처럼 애매하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민적 불안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혼란스러운 메시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시급히 이 혼란을 정리해야 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외교부는 정 장관의 발언 이후 지금까지 더 이상의 추가 설명이나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장관께서 그 계기에 했던 말 그대로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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