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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고영의 문헌 속 ‘밥상’] 100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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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라상은 아침 10시, 저녁 5시 두 차례만 올리고 2시쯤 돼서 간단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셨다. (중략) 한여름 무더울 때면 순종은 ‘오늘 간식은 참외와 제어탕(제호탕)을 먹어볼까’ 하는 식으로 주문을 한다.”

경향신문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조선의 마지막 왕비 윤씨가 순종과 혼인할 적에 함께 궁에 들어와, 일평생 윤씨의 시중을 든 김명길(金命吉, 1894~1984)이 남긴 회고록 <낙선재 주변>(1977)의 한 구절이다. 김명길은 윤씨와 함께 고종과 순종의 시대를 겪었으니 당시 왕실의 일상에 관한 회고가 사뭇 볼만하다. 그때 조선의 임금은 회고록에 나타난 것처럼 점심이 간소한 세 끼를 먹었다. 이 차림의 기본은 장이다. 낙선재 뒤 광 앞으로는 진간장독 쉰 개가 벌여 있었고, 간장과 고추장 관리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담당자의 별명은 ‘장꼬마마님’. ‘장꼬’란 궁의 장독대인 ‘장고(醬庫)’에서 왔을 테다. 그리고 ‘마마’는 최고위인 임금과 그 가족에게 붙는 말이다. 거기다 ‘님’ 하나가 더 붙은 ‘마마님’은 마마를 받들어 모시는 상궁을 대접해 부르는 말이다. 가장 존귀한 존재에게는 ‘님’ 자조차 사족이다.

김장은 어땠을까. 섞박지, 동치미, 송송이(깍두기), 보김치, 젓국지 등을 망라해 궁에서는 한 번에 1000포기를 담갔다. 채소 다듬는 데 하루, 절이는 데 하루 해서 꼬박 열흘 걸린 큰일이었다. 명절에는 호두, 잣, 밤, 대추, 황밤이 궁에 가득했다. 황밤은 껍질과 보늬를 벗기고 살짝 말린 밤이다. 임금은 장조치(찌개), 젓국조치, 장산적, 고기와 해삼과 홍합 양념조림인 삼합장과, 찜, 구이, 산적, 누름적, 김치, 튀각, 편육, 익혀서 무친 숙채, 날로 무친 생채, 젓갈, 고기를 절여 말린 포자반, 육회, 어회, 녹말 입혀 데친 생선살이 들어간 잡채인 어채, 수란, 소고기를 볶아 끓인 황볶이탕, 차돌박이 경단을 조린 차돌조리개, 팥물로 지어 고운 분홍빛 도는 팥밥인 팥수라 등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고종은 평소에 사과, 밤, 증편, 사이다, 식혜를 좋아했고 야참으로는 설렁탕, 냉면, 온면을 즐겼다. 김명길에 따르면 “고종이 즐겨 잡수시던 냉면은 담박한 것으로 국물은 육수가 아니라 배를 많이 넣고 담근 시원한 동치미였다. 냉면 위에 덮는 꾸미는 가운데에 십(十) 자로 편육을 얹고 나머지 빈 곳에는 배와 잣을 덮은 것이었다.” 배는 칼이 아니라 수저로 얇게 저며 얹었다. 냉면의 맛은 달고 시원했다고 한다. 이는 그 즈음 서울에서 생긴 요식업소의 냉면 및 오늘날의 냉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14세 윤씨가 33세의 순종과 가례(嘉禮), 곧 혼인식을 치른 게 1907년이다. 그러니 이상의 회고는 약 100년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읽어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황밤은 사전을 찾아볼 만한 어휘가 됐다. 젓국지는 어떨까. 포자반이나 어채는 바로 감이 올까? 오히려 커피, 디저트, 아이스크림 등이 현대 한국인에게 보다 익숙할 테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음식은 100년 전에 사이다 한잔이라도 여느 백성보다 먼저 마실 수 있었던 계급이 가장 먼저 누린 일상이었다.

고종의 커피 기호는 유명하다. 고종과 궁의 서양식 과자 기호는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먼저 기록한 바다. 커피는 디저트를 포함한 양식과 한 벌이다. 순종은 “매달 한 번쯤은 손수 덕수궁으로 부왕(고종)을 찾아뵙고 양식을 드시며 부자간의 정을 나누”곤 했다. 그 시대는 “궁중의 전통적인 잔칫상보다 양식이 인기가 있어 아이스크림, 수프 등이 입맛을 돋우기도 했다. (중략) 양반들도 칼질을 배우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칼질 배울 만한 사람들은 프록코트, 모닝코트를 갖춰 입고 돌아다녔다. 윤씨가 만년에 쓰던 토스터와 커피포트는 또한 윤씨가 가는 길에 부장품으로 묻혔다. 지난 100년, 낯선 일상과 익숙한 일상이 이렇게 엉기기 시작했다. 엉겨 오늘에 이르렀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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