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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세상읽기] 원천상회와 쌍봉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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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구멍가게’ 열풍이다.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에 있는 동네 슈퍼 ‘원천상회’에서 유명 배우들이 열흘 동안 가게를 운영하며 겪는 좌충우돌기 예능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덩달아 화천군에는 근래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대면으로 하는 산천어축제가 취소되고 여러 어려움을 겪던 차에 예능프로그램 하나가 일으킨 나비효과다. 지나는 길에 들렀더니 상회 앞이 장사진이다. 가게 주인은 라면을 끓이느라 정신이 없고 인기가 높았던 ‘대게라면’은 품절이다. 점심때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라면을 먹으러 줄을 서 있고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마을주민들을 위해 주인이 내주던 무료 자판기는 쉴 새 없이 종이컵을 토해내고 있었다. 검은개 ‘둥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경향신문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초등학생 때 <전원일기>를 보며 의아했던 것 중 하나가 ‘쌍봉댁’의 슈퍼였다. 농촌에 저런 가게는 면 소재지거나 두세 개 정도의 행정리가 마주치는 삼거리, 학교 앞에서 문구점과 버스정류소를 겸하지 않는다면 수지를 맞추기 어려운데 어떻게 저렇게 꾸려가나 싶었다. 쌍봉댁 가게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사는 아낙들을 보면, 저 집에는 찌개에 두부가 들어가겠구나, 여겼다. 농촌에서는 두부가 귀했다. 먼 장에서 사들고 오다 깨지기 일쑤고 여름엔 쉬어버려 까다로운 식품이었다.

1960~1970년대 농촌 부녀회 주도로 ‘구판장’을 통해 식료품과 생필품을 공동구매, 공동판매를 하기도 했다. 관제 동원의 측면도 있지만 상점이 없는 마을의 생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구판장은 농촌 여성들의 자치와 협동, 경제적 자립활동의 구심점이 됐지만 농촌에 사람이 줄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나마 유통기한이 긴 소주나 건국수, 깡통음료수라도 팔던 ‘점방’마저 간판으로만 남고 대다수 사라졌다.

‘원천상회’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의 성실함, 그리고 동네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가 있어 주민들이 오고 가고 우체국과 보건소, 재학생 30여명 정도의 원천초등학교와 파출소, 제법 규모를 갖춘 의용소방대도 있다. 무엇보다 농공단지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적으나마 유동인구가 받쳐준다. 농촌 구멍가게의 역사적 의미와 공동체적 기능을 연구해온 심우장 국민대 교수의 ‘구멍가게의 역사와 기능’이란 논문에서 보면 농촌의 구멍가게는 정보를 공유하고 교환하는 영농교육장 역할을 하는 동시에 동네의 사랑방이자 놀이터이다. 우편 업무를 대행하거나 응급약을 공급하기도 한다. 외상과 급전을 융통해 줄 수 있는 마을 금융기관 역할까지 겸하면서 농촌의 공동체 기능 유지에 핵심적인 구실을 수행해왔다.

편의점과 마트에 익숙한 도시의 삶을 사는 우리가 끝내 가질 수 없는 ‘상상의 공동체’가 바로 원천상회다. 그래서 근래 구멍가게에 대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이 아니라 여행이자 이벤트이니 슈퍼에서 맥주와 라면 먹고 인증 숏 찰칵! 그렇게 하루 들러 라면 한 그릇 먹고 떠나면 그뿐, 드라마 촬영장소에 사람들이 대거 몰린 뒤 폐허로 남은 장소가 어디 한두 곳이랴.

‘원천상회’가 굳건하려면 우체국과 보건소가 있어야 한다. 버스가 오고 가야 하며 담배를 사러 오는 노인들이 건재해야 한다. 아이스크림을 찾는 꼬마 손님들도 있어야 한다. 원천초등학교 전교생은 현재 30여명, 1930년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이 학교가 학생들이 없다는 이유로 문을 닫지 않아야 마을이 유지된다. 현재 강원도 화천군의 인구는 2만4446명, 지난 3월보다 60명 줄어든 숫자다. 아마도 세상을 떠났거나 지역을 떠났으리라. 근래 화천군은 원천농공단지 입주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니느라 바빠 보인다. 결국 농촌이 살아남아야만 ‘원천상회’도 ‘쌍봉댁’들도 살아갈 수 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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