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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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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주간지의 편견 극복 르포 '혐오 없는 삶'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준억 기자 = "문제는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는 거죠"

독일 극우정당인 국가민주당(NPD)에서 활동한 즈벤 크뤼거는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 편집장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무슬림을 혐오하고 좌파를 무시하며 흑인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네오나치인 크뤼거가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친교를 맺은 사연과 아프리카 여행에서 병에 걸린 한 급진좌파의 배낭을 대신 들어주고, 현지 부족민과 낚시를 즐겼다는 일화를 들려주자 베르브너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물었던 것이다.

이런 크뤼거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베르브너가 미국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제시한 '접촉가설'의 성공 사례를 발굴하는 작업을 담은 책 '혐오 없는 삶'(판미동 펴냄)이 번역 출간됐다.

접촉가설에 따르면 적대자들 사이의 접촉은 상대에 대한 지식을 키우고 불안감을 감소시키며 공감 능력을 제고해 편견 감소에 기여한다.

저자는 증오를 줄여주고 적대감을 없애는 이 가설은 1970년대 이후 가설에서 이론으로 증명됐지만, 전문가들만 알고 있는 현실에 따라 양극화 극복을 위해 이 메커니즘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곳들을 찾아 나선다.

책에는 독일 함부르크의 난민 수용을 반대하던 노부부가 자신의 연립주택에 정착한 난민 로마족(집시)과 가족처럼 지내게 된 사연, 덴마크 경찰서의 테러 예방 경찰관이 무슬림 청년과 신뢰 관계를 구축해 그들이 이슬람 성전을 위해 시리아로 가지 않고 덴마크 사회에 적응하게 된 사례 등이 소개된다.

올포트는 접촉가설을 제시한 책 '편견'을 출간한 1954년의 상황을 책 서문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비이슬람교도들을 믿지 못한다.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에 둘러싸여 있다. 난민은 황량한 땅을 방랑한다. 몇몇 적대감은 실제 이해관계에 근거를 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상상과 공포의 산물이다. 그러나 상상의 공포도 실제 고통을 낳을 수 있다"

저자는 약 70년 전의 이런 상황은 '필터 버블'(filter bubble) 사회가 되면서 양극단화에 따른 균열이 더욱 깊어졌다고 지적한다. 낯설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장소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많은 집단 사이에, 빈자와 부자 사이에,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이민자와 정주민 사이에 종종 거리와 침묵이 지배하며 편견을 배양하기에 이상적인 토양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둘러싼 필터 버블을 터뜨리면 편견을 깨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며 '접촉'을 제안한다.

특히 접촉을 우연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정책에 의해 좀 더 다채로운 방향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저자는 집단에 대한 편견을 바꾸기 위해 그 집단의 구성원 하나를 만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구성원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며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고 비판한다.

대표적 사례로 유럽 난민사태로 독일에서 이슬람 혐오 정서가 커졌던 2016년 초 북부도시 킬의 쇼핑센터에서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성희롱 사건 보도를 설명한다.

당시 아프간 청년 두 명은 식당에 앉은 소녀들을 지나가다 그들을 보고 웃었고 소녀들이 항의하자 손으로 키스하는 흉내를 내 실랑이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은 앞다퉈 사안을 심각하게 부풀렸고 독일 ARD 방송은 저녁 종합뉴스에서 "젊은 여성 세 명이 여러 명의 이민자 남성들로부터 심각한 성폭력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저자가 일하는 디 차이트는 '독일을 말한다'라는 새로운 사회 접촉 실험에 나선다. 독자들에게 정치 성향과 관련한 질문들을 던지고 모든 답이 다른 두 독자를 연결해주면서 만나서 서로 이야기해보라고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이렇게 8천 명이 넘는 사람이 이 대화에 참여했으며 참가자 다수는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는 이메일을 디 차이트로 보냈다.

독자들의 이메일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흥미로운 관점들을 알게 됐습니다. 속편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의견 교환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주장의 약점도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등 동의와 공감을 발견했다는 반응들이었다.

저자는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라며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승희 옮김. 312쪽. 1만7천 원.

연합뉴스



justdus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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