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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갑들의 모시기 전쟁 ‘슈퍼을’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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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하나. 검사, 교수, 세무 공무원 셋이 밥을 먹으면 누가 돈을 낼까. 정답은 ‘식당 주인’이다. 그만큼 이들의 위세가 높고 자영업자는 ‘을(乙)’이라는 해학적인 농담이다. 그런데 식당이 ‘맛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아무리 권세가라도 긴 줄을 기다려 들어와 다음 손님 눈치 보며 빨리 먹고는 점주 얼굴도 못 보고 나와야 할 테다. 맛집은 을 중에서도 ‘슈퍼을’이기 때문이다.

독보적 경쟁력으로 을의 위치에서도 갑(甲)의 지위를 누리는 ‘슈퍼을’이 주목받는다. 권위주의 체제가 약화되고 글로벌 시장이 통합되며 실력으로 승부하는 기업이나 인재의 협상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플랫폼 경제 시대로 접어들며 업계 1위 브랜드의 ‘승자 독식 현상’이 가속화된 것도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희소가치가 높은 명품, 유명 맛집, 개발자, 핵심 부품 생산 기업, 충성도 높은 폴로어를 거느린 인플루언서 등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시대에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등 백신을 개발한 글로벌 제약사는 일국의 장관도 미덥지 못하다며 대통령이나 수상과 직접 협상하는 ‘울트라슈퍼을’ 반열에 올랐다.

슈퍼을 전성시대에 시장은 어떻게 달라질까. 갑도 매달리는 슈퍼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경이코노미

“입점만 해주면 1층에서 가장 좋은 입지에, 입구에서부터의 동선도 가장 유리하게 싹 리뉴얼하겠다고 수차례 제안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요. 단지 유리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입지’를 찾는 것 같더군요.”

루이비통, 샤넬과 함께 세계 3대 브랜드로 꼽히는 에르메스 매장 유치를 추진했던 한 백화점 관계자 전언이다.

유통 업계 전통의 ‘갑’인 백화점도 절절 매는 이들이 있다. 명품과 맛집이다. 전자는 구매력 높은 VVIP 고객을, 후자는 대중 고객을 끌어들이는 ‘키 테넌트(key tenant·핵심 점포)’다. 업계에 따르면 백화점 총매출에서 명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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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매출의 최대 50%를 좌우하는 명품 매장은 백화점이 유치에 사활을 걸 정도로 영향력이 큰 ‘슈퍼을’이다. 사진은 샤넬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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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이들이 명품을 사러 왔다가 추가로 구매하는 패션, 가구, 잡화 등까지 더하면 사실상 매출의 절반을 좌우한다. 실제 국내 매출 상위 5위권 백화점은 모두 3대 명품 중 적어도 한 개 이상은 입점해 있다. 상황이 이렇자 백화점 업계에서는 ‘명품 매장 모시기’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 일반 의류, 잡화 브랜드 판매수수료가 30% 안팎인 반면, 명품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독보적 경쟁력을 앞세워 ‘갑’인 플랫폼 기업에도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슈퍼을’이 주목받는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집객력, 소비자 충성도, 스토리텔링을 무기로 플랫폼에 상당한 매출과 점유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플랫폼 경쟁이 격화되고 글로벌 시장이 통합될수록 슈퍼을의 입지는 공고해진다. 1등 브랜드나 콘텐츠에 대한 쏠림 현상이 강화되는 양극화 현상도 슈퍼을에는 기회다. 이제 갑은 슈퍼을을 모셔야, 을은 슈퍼을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간 소상공인은 ‘만년 을’로 통했다. 건물주나 블랙컨슈머의 갑질에 자주 시달렸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온라인 소상공인, 즉 셀러(seller)가 입점한 오픈마켓 등 온라인 쇼핑몰이 앞다퉈 수수료를 내리며 셀러 모시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위메프는 지난 4월 21일부터 그간 운영하던 오픈마켓 방식의 차등수수료를 없애고 업계 최저 수준의 정률수수료(2.9%)를 채택했다. 기존 남성 캐주얼 15.4%, 도서 11.6%, 디지털 기기 12.8%에 달하던 수수료율을 단번에 10%포인트 이상 내렸다. 네이버는 한성숙 대표가 직접 나서 소상공인(SME)을 위한 빠른 배달과 해외 진출 지원까지 공언했다. 몇 주나 걸리던 판매대금 정산도 ‘익일 정산’으로 확 앞당겼다. 티몬은 아예 ‘마이너스 수수료’ 정책을 들고 나왔다. 판매자들이 개별 단위로 상품을 등록할 경우 수수료를 오히려 환급해준다. 통상 3%대인 PG수수료도 티몬이 부담한다. 이커머스 시장이 급성장하며 조금이라도 셀러를 더 모아 상품 구색을 많이 갖추려는 전략이다.

전문가들은 슈퍼을 전성시대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플랫폼 경쟁이 치열해지며 우수 인재나 점포, 콘텐츠 확보가 새로운 ‘게임의 룰’로 떠올랐다. IT 업계에서 개발자, 백화점에서 맛집, 이커머스 업계에서 셀러 모시기 경쟁이 대표 사례다.

백화점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굳이 맛집이 없어도 고객이 줄을 섰다. 이제는 달라졌다. 특히 온라인 쇼핑에 익숙한 20~30대 젊은 고객층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는 SNS에 인증샷을 올릴 만한 맛집이 필수가 됐다. 이에 백화점 바이어들은 지방 유명 맛집을 찾아 입점을 요청하는 게 일이 됐다. 한 백화점 식품 부문 바이어는 유명 맛집을 50번 넘게 찾아가 오너 셰프의 가족과도 친분을 쌓은 뒤에야 겨우 유치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넘어 ‘오십(五十)고초려’인 셈이다.

둘째, 디지털 시대에는 ‘승자 독식’이 일상화된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셀러와 콘텐츠를 보유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인기 있는 그것을 확보했는가도 중요해졌다.

유튜브, 팟캐스트 등에서 유명 크리에이터 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마존은 자사 스트리밍 플랫폼 ‘트위치’를 키우기 위해 스타 유튜버에게 수십억원에 달하는 출연료와 광고 판매 수입 배분을 제안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구독자 1만명 이하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도 콘텐츠만 독창적이면 영입 대상으로 떠올랐다.

구독자 약 3000명을 보유한 A크리에이터는 얼마 전 새로 생긴 오디오 플랫폼 업체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자사 플랫폼에도 채널을 개설, 운영하면 자사는 물론, 제휴 플랫폼 여러 곳에 상단 노출 등 마케팅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이다. A크리에이터는 “구독자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닌데 제안이 와서 얼떨떨했다. 플랫폼 경쟁이 정말 치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셋째, 갑이 예전처럼 갑질을 하기 힘들어졌다. 권위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SNS가 발달한 덕분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규모 유통업자 29곳과 거래하는 납품업자·매장임차인 7000곳을 대상으로 ‘2020년 유통 분야 서면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불공정거래 행태가 1년 전보다 개선됐다고 응답한 비율이 9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적인 정부의 제도 개선, 유통-납품 업계의 상생협력 등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특히 표준거래계약서 사용률은 99%에 달해, 유통 업계에서 표준거래계약서 사용이 사실상 정착됐다는 평가다. 물론 상품판매대금 지급 지연, 판매촉진비용 전가 등 불공정행위는 여전했지만 전반적인 경험률은 전년 대비 하락했다.

갑이 약해질수록 을은 상대적으로 강해진다. 한 백화점은 얼마 전 잡화 부문 입점 브랜드 판매수수료를 5%포인트가량 대폭 할인했다. 대외적으로는 정부 정책 기조에 맞춰 상생 행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실제는 매출 부진으로 철수하려는 브랜드들을 달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것이 담당자의 귀띔이다. 백화점 집객력이 약해지며 브랜드 협상력이 높아진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옛날 같으면 브랜드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다른 지점에 입점한 매장에 불이익을 주겠다며 으름장을 놨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SNS에서 회자될 수 있어 함부로 갑질도 못한다”고 귀띔했다.

물론 슈퍼을 전성시대가 을에게 마냥 기회 요인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슈퍼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바이럴 마케팅에 민감한 MZ세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메가 브랜드’를 찾는다. 품질이나 화제성이 떨어지면 언제든 슈퍼을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지금은 플랫폼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지만, 특정 플랫폼 기업의 점유율이 높아지면 슈퍼을에 대한 협상력이 다시 강해질 수 있다. 이처럼 변화가 많은 시장에서 슈퍼을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결국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의 분석이다.

[노승욱·나건웅·반진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8호 (2021.05.12~2021.05.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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