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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아침을 열며]국가,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지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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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4월28일 햇살 좋은 조용한 아침.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 앞으로 미군 차량 약 40대가 들이닥쳤다. 이 마을 뒤 골프장 부지에 있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미사일 기지에 발전기 공사 차량 등을 진입시킨 것이다. 전날부터 장비가 들어간다는 얘기가 주민들과 활동가들 사이에 공유됐고, 새벽부터 차량 진입을 막으려는 시민 70여명이 모였다. 경찰은 미군 차량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이 일대에 25개 중대, 1500여명의 인력을 투입했다. 결과는 한국 경찰과 자국민들 간의 충돌이었다. 경찰의 강제 해산 과정에 주민과 활동가 등 3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드철회평화회의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 고령의 주민들이 많은 작은 마을에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라며 규탄했다.

경향신문

손제민 사회부장


이 풍경은 언젠가부터 이곳에서 몇 달에 한 번꼴로 벌어지는 일상이 됐다. 마침 이날은 원불교 명절인 대각개교절이었는데, 지근거리에 성지(聖地)가 있는 이 종교의 성직자들의 분노가 컸다. 한 원불교 교무는 말했다. “정부도 참 이상해요. 꼭 전날 미리 알려주네. 그렇다고 사드를 정식 배치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정확한 속을 모르겠어요.”

딜레마.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 이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29일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직후 ‘강력한 대북 메시지’라며 그때까지 완전히 배치되지 않았던 잔여 사드 발사기의 조기 배치를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집권시켜준 ‘촛불 민심’을 의식해 환경영향평가 등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식 배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4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환경영향평가도, 정식 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내 일각에서 사드 기지 내 미군 장병들의 복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미군 당국자들이 압박하면서 정부는 미국 측 요구를 무시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장비가 들어간 지 이틀 뒤인 4월30일 비로소 문 대통령의 백악관 방문 날짜가 5월21일로 정해졌다는 양국 발표가 나왔다.

국가안보는 무엇인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핵심은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것이다. 사드는 어떤 위협으로부터 누구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박근혜 정부 말 사드 도입 결정 당시부터 이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부터 한국 시민들을 지키는 데 적합한 무기 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의 많은 미사일 전문가들이 지적했다. 사드는 이름 그대로 높은 고도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마지막 단계에서 잡아내도록 고안된 미사일방어(MD) 체계다. 북한이 남쪽을 향해 핵무기를 쓸 때 낮은 고도로 날리면 사드는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미국 미사일방어청이 지난해 사드 시스템과 중고도 요격에 용이한 패트리엇 시스템을 연동하기 위한 발사 실험을 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이 지난 4월28일(장비 반입일과 같은 날이다) 미국 회계감사원(GAO)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9번의 계획된 실험 중 7번은 코로나19로 인해 못했고, 그나마 수행한 2번의 실험은 소프트웨어 문제로 실패했다. 아직 사드는 한국 시민에게 공언했던 배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무기라는 의미다.

오히려 이 무기 체계의 배치는 한국이 북한 미사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보다 사드의 한 구성요소인 X밴드 레이더(AN/TYP-2)를 한반도에 설치함으로써 중국을 감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더 강하다. 그것은 한국이 대놓고 미국의 MD 체계에 편입되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내놓은 고육책 같았다. 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이를 강하게 부인하지 않는다. 미군을 지키는 무기인데, 주한미군이 지켜져야 한국 시민들도 안전하다는 점에서 결국 사드는 몇 단계를 건너뛰어 한국의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문 대통령의 한 참모는 4년 전 사드 임시배치 완료 당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은 한반도 평화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거칠 수밖에 없는 작은 소란에 불과하다.” 문 대통령은 4년의 시간이면 북한 핵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켜 사드 자체가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순진한 기대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열흘 뒤 미국의 새 대통령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문 대통령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이나 자국민과 경찰의 충돌이 반복될 상황에서, 이 질문을 생각해봐야 한다. 사드는 정말로 한국 시민을 지키는 무기인가.

손제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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