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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70년 만에 한국 땅 밟는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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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40주년 특별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 8월29일까지

반입 금지됐던 ‘한국에서의 학살’ 등 모더니즘 서양미술 볼 수 있어

[경향신문]

“서울지검 공안부는 9일 상오 불란서 화가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의 이름을 광고 등에 이용하는 행위는 반공법 4조1항(국외 공산계열의 동조 찬양, 고무) 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차로 크레온 제조업자인 박○○씨(45)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또한 ‘피카소·크레파스’ 등의 광고를 금지시키고 판매 중인 상품의 ‘피카소’ 이름을 지우도록 지시했다.”(경향신문 1969년 6월9일 보도)

이 기사에서 검찰은 ‘좌익화가’ 피카소의 그림을 문제 삼는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은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 문제작이었다.

■ 한국에 온 ‘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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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합판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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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파블로 피카소(1881~1973)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 110여점으로 구성된 ‘블록버스터’ 전시다. 입체주의 탄생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피카소 예술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피카소의 이름값도 이름값이지만, 화제가 된 이유는 따로 있다. 70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에서 전시되는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이다.

2m에 달하는 화폭 오른편에 중세 기사처럼 철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6명의 군인이 총칼을 겨누고 있다. 폭력이 향하는 왼편에는 벌거벗은 여성과 아이 8명이 있다. 겁에 질린 아이를 숨기는 임신부부터 코앞에 닥친 죽음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아이까지. 공포에 질린 사람들과 군인들의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51년 1월18일 완성해 그해 5월 프랑스 파리 ‘살롱 드 메’전에서 처음 공개했다.

이전에도 국내 전시가 추진됐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의 반미 선전용 그림이었던 데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개입한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이 창작 배경이라는 설 때문이었다. 1980년대까지도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에 올랐다.

남루한 과거를 지나 오늘날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읽는 것은 ‘반전’ 메시지다. 작품 구도는 피카소가 존경하던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3일’(1814)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폴레옹군에 무참히 살해당하는 양민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고발한 작품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8~1869)을 그렸고, 피카소도 전쟁의 살상 행위에 대한 고발을 비슷한 구도로 담아냈다. 사실 선전화치고는 구체성이 떨어지는 데다, 완성도가 탁월한 수준도 아니어서 해외에선 크게 주목받은 작품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게르니카’(1937),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고발한 ‘시체구덩이’(1944~1946)에 이은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으로 꼽힌다.

■ 피카소로 보는 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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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든 남자, 1911, 캔버스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전시는 피카소로 보는 모더니즘 서양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피카소는 평면에 다양한 시점을 조합한 ‘입체주의(큐비즘)’로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의 전통을 흔들었다. 이번 전시에는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없지만, 그의 분석적 입체주의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대형 입체파 작품 중 하나인 ‘만돌린을 든 남자’(1911)가 주목할 작품이다. 회화와 조각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기타와 배스 병’(1913)은 이번 전시 작품 중 보험가액이 800억원으로 가장 비싸다. 큐비즘을 실험하던 피카소가 자신이 좋아하는 오브제 중 하나인 기타를 모티브로 해 마분지, 파피에 콜레, 천, 끈 등 여러 재료를 조합해 만든 부조이다. ‘현대 조각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언뜻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보이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실마다 펼쳐진다. 입체주의에서 구상 회화로 돌아간 피카소가 절친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화폭에 담은 ‘편지 읽기’(1921)는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피에로 복장의 폴’(1925)은 아들 폴을 사랑스럽게 그렸다. 그는 배경을 어두운 색면으로 처리하고 옷을 흰색으로 칠해 원근감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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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피카소의 여인’들에 대한 그림이다. 처음 페르낭드 올리비에부터 마지막 자클린 로크까지 피카소는 새로운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작품 경향이 바뀌었다. 이번 전시에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눈에 익은 작품들이 왔다. 관계의 상태에 따라 밝았던 얼굴이 우울한 분위기로, 다시 노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변화들이 눈에 띈다. 피카소가 애인들을 어떤 마음의 눈으로 바라봤는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회화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각, 도자기 등 피카소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서순주 전시커미셔너는 “코로나19로 해외 전시들이 중단돼 한국에서 대규모 전시가 가능했다”며 “피카소의 삶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29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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