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에서도 중·러 등 경쟁국에 백신 기술 유출 우려 나와
조 바이든 미국 정부 지지로 본격화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지재권) 면제 논의가 험로에 봉착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반대입장을 표명한 데다 미국 내에서도 중국·러시아 등에 백신 관련 기술이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8일(현지시간) 끝난 EU 정상회의에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핵심국 정상들은 백신 지재권 면제 논의에 앞서 미국이 백신과 원재료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백신 지재권 면제는 공급 부족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라면서 “미국이 백신과 원재료를 세계에 제공해야 할 때다. EU는 유럽에서 생산되는 백신을 세계로 공급해왔고, 이것이 국제 표준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EU는 세계 각국에 2억회분의 백신을 수출했지만, 미국은 국방물자생산법을 앞세워 백신은 물론 원료 수출까지 막아왔다는 점을 콕 찍어 지적한 것이다. 백신 수출도 막고 있는 미국이 지재권 면제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란 비판이기도 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도 “미국에 백신과 원료 수출 금지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며 독일 편에 섰다. 앞서 인도 세룸인스티튜트 등 백신 제조업체들은 미국으로부터 원료를 수입할 수 없어 백신 생산이 지연된다고 밝혔다. 지재권 면제 결정을 위해서는 164개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EU는 물론 영국, 일본, 스위스 등도 반대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백신의 핵심 바이오 기술이 중국, 러시아 등 경쟁국에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날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정부는 제약업계와 공유한 질의응답에서 화이자와 모더나의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반 백신 기술이 중국,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는 점을 우려했다. 관련 특허에 대해선 이미 접근이 가능하지만, 온도와 같은 생산공정 정보는 영업 비밀로 공개되지 않았다.
제약사 관계자들은 mRNA 백신을 만드는 데 80~100건의 특허가 관여된 만큼 지재권 면제 과정이 매우 복잡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WTO와의 협상이 수개월에 달할 수도 있고, 핵심 기술이 빠진 채 지재권 면제가 이뤄질 가능성도 크다. 미국 정부가 거대 제약사로부터 소송을 당해 장기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장기간 법정 분쟁이 이뤄져 코로나19 사태 해결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재권 면제만큼 중요한 것은 백신 제조 노하우, 숙련된 인력, 품질 관리 방법 등 백신 관련 인프라가 세계에 공유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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