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며 소각하 판결을 내렸다. /이선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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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 가능성 낮지만 日 만행 알릴 기회"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며 소각하 판결을 내렸다. 석 달 전 "반인도적 범죄에서 주권면제론은 고정적 가치가 아니다"라며 피해자 손을 들어준 판결과 상반된 결과인 만큼 각하 판결을 둘러싼 잡음이 크다.
당사자인 피해자들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촉구하고 있지만 승소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앞서 ICJ는 비슷한 사건에서 주권면제론을 인정하고 전범국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소해도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적지 않다.
◆일본의 위안부 동원을 '위법한 주권 행위'로 본 법원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지난 1월 고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의 피해자가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21일 민사합의15부는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와 유족 등 20명 낸 소송에서는 소각하 판결을 내렸다. 결과는 다르지만 두 사건 모두 쟁점은 주권면제 원칙이었다. 주권면제 원칙이란 국가는 다른 국가 재판 피고로 서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피해자 손을 들어준 민사합의34부는 "국가면제 이론은 국제 질서 변동에 따라 계속 수정되고 있으며 여러 국가의 국내법에서 국가면제가 인정되지 않는 예외사유를 정하고 있는 점에 비춰 보면, 국가면제 이론은 항구적이고 고정적 가치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미국과 영국, 싱가포르,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이 국가면제의 예외 사유를 법률로 규정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러한 법률은 주권면제론을 고수한 일본도 국내법으로 규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각하 판결을 내린 민사합의15부는 "대한민국은 외국을 상대로 한 민사 재판권 행사에서 국가면제의 범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고 관련 조약도 체결한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면제 여부를 판단할 근거는 오로지 '국제관습법'뿐이라고 제한했다. 국제관습법은 국가의 주권적 행위만 국가면제론을 인정한다. 민사합의15부는 일본의 위안부 동원을 위법한 '주권 행위'로 판단하면서 국가면제론을 인정했다.
민사합의34부에서 사례로 든 국가면제 예외 사유를 규정한 국가에 대한 시각도 달랐다. 민사합의15부는 "영토 내 불법행위에 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은 국가는 37개국으로 유엔 회원국 중 19.2%에 불과하다"며 "국가면제를 부정하는 개별 국가의 (법률) 시행이 일반적인 관행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봤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 선고공판을 마친 뒤 이상희 변호사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남용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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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하라는 법원, '재판'하라는 피해자
민사합의15부는 소각하 판결을 내리며 "법원으로서는 대한민국 헌법·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국제관습법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이 여러 차례 밝힌 바처럼 외교적 교섭 등 대내외적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제시했다.
선고 공판에서 낭독한 선고문에서도 "행정·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됨이 타당하다"며 문제 해결의 주축은 정부와 국회가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법원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입장이다. 피해자 측 대리인 이상희 변호사는 21일 선고 직후 취재진과 만나 "입법과 행정에서 구제받지 못한 분들, 소수자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의 최후 보루가 법원이 아닌가. 행정부가 제대로 피해자를 구제했다면 왜 법원에 오겠는가"라고 규탄했다.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은 ICJ 제소를 촉구하고 있다. 21일 선고 도중 법정을 빠져나온 이용수 할머니는 취재진과 만나 "국제사법재판소로 꼭 갈 것"이라고 밝혔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후 이용수 할머니가 법원을 나서고 있다. /남용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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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J 제소 패소 가능성 높지만 일본 전쟁범죄 알릴 기회
이 할머니의 염원과 달리 ICJ 제소에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ICJ는 이미 이탈리아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주권면제론을 이유로 독일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자국인 페리니가 독일을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 사건에서 "국제 범죄에 해당하는 국가 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페리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돼 노역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ICJ에서 뒤집혔다. '독일에 대한 재판권 면제를 부인한 이탈리아 법원의 결정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유다.
독일이 ICJ에 제소한 건 2008년 12월, ICJ가 독일 승소로 판결한 건 2012년 2월의 일이다. 한국 정부에서 패소 가능성이 높은 데다, 장기간 진행되는 국제 소송전을 시작할 의지가 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승·패소보다 일본의 만행을 낱낱이 밝힐 수 있다는 점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말한다. 김현정 '위안부' 문제 ICJ 회부 추진위원회 대변인은 "국가면제는 지엽적 이론일 뿐 핵심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를 인신매매해 위안소를 운영하는 행위 자체가 국제법 위반인지 밝혀달라는 것이 ICJ 제소의 가장 큰 의의"라며 "주권면제론이 뒤집혀 승소할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패소해도 위안부 문제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대규모 성 착취로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국제법 전문가 사이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ICJ 회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법학과 교수는 "(ICJ에서) 지더라도 지는 게 아니다. 지더라도 가는 게 좋다는 주장도 학계에서 적지 않다"며 "페리니 사건 당시 독일의 강제노동이 얼마나 심각한 인권 침해였는지 전 세계가 주목했다. 독일에 비해 일본의 만행은 국제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ICJ에 회부되는 것만으로도 한국이 얻어가는 게 많다"고 설명했다.
국제법에 밝은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패소하면) 외교 관계자들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부담이 큰게 현실"이라며 "당장 승·패소에 의존하기보다 일본의 범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국민 정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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