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 |
(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지난 주말 시작한 2021 KBO리그에서 단연 화제는 새 구단 SSG 랜더스와 추신수(39)다.
SK를 대신해 신세계가 KBO리그의 새 식구가 될 줄은, 고교 졸업 후 줄곧 미국에서 뛰던 추신수가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상 못 한 일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해인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난 추신수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 천재'로 불렸다.
수영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또래에서는 투수와 타자 모두 최고의 실력을 드러냈다.
부산고 3학년이던 2000년에는 캐나다 에드먼턴서 열린 세계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MVP)로 선정했다.
추신수는 이 대회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곧바로 미국 시애틀 매리너스와 137만달러에 입단 계약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생활은 참으로 힘들었다.
시애틀에는 같은 우익수 포지션에 일본인 타자 스즈키 이치로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추신수는 좀처럼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오랜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200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면서 비로소 가능성이 보였다.
추신수 |
추신수는 힘들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8년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자리 잡은 추신수는 3할에 가까운 타율과 호타준족의 상징인 '20홈런-20도루'를 세 차례나 달성했다.
폭넓은 수비와 강한 송구 능력도 인정받은 추신수는 2014년 한국인 스포츠선수로는 역대 최고액인 1억3천만달러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계약을 했다.
만약 추신수가 고교를 졸업하고 국내 구단에 입단했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선수 생활을 했을 것이다.
20대 초중반을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미국 시골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추신수는 자신이 세운 목표가 있었기에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야구 인생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
추신수의 동기생인 오승환(삼성 라이온즈)과 이대호(롯데 자이언츠)도 남다른 도전 의지를 보였다.
둘은 KBO리그에서 시작해 일본 프로야구를 거쳐 미국 메이저리그까지 섭렵하고 돌아왔다.
야구를 떠나 어떤 분야에서도 이루기 쉽지 않은 업적이다.
수년 전 출간된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들의 힘겨운 인생 보고서이지만, 프로야구에서 82년생들은 이제 '도전의 아이콘'이 됐다.
KBO 사옥과 로고 |
추신수와 KBO리그는 우연히도 나이가 같다.
추신수가 부산을 떠나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동안 KBO리그도 40년 동안 외형적으로는 엄청나게 변모했다.
출범 당시 6개 구단 124명에 불과했던 등록선수는 올해 10개 구단 790명으로 확대됐다.
첫해 143만명이던 관중은 2016∼2018시즌 3년 연속 800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선수 연봉은 1982년 2천400만원으로 최고액인 박철순보다 올해 27억원에 계약한 추신수가 112배나 많다.
프로야구 산업 규모 또한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수십 배는 커졌을 것이라는 게 KBO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하지만 4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KBO리그 구단들은 여전히 적자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수입 증대보다 팀 성적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 리그 전체 수입이 늘어나는 방안이더라도 자신 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거부하는 행태도 여전하다.
최근 10개 구단은 코로나19로 인해 자금 압박을 받자 다시 중계권료와 관중 수입 분배 방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40년 동안 KBO리그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단 이기주의'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shoeles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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