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들의 디지털화폐(CBDC)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런 상황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실제 중국은 지난 설 연휴 일부 시민들에게 ‘디지털 세뱃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CBDC는 전자 형태로 발행되는 중앙은행 암호화폐다. 실물은 없지만 국가가 발행하는 디지털화폐여서 실물 화폐와 동일한 기능을 갖는다. 개인의 디지털 지갑에 보관돼 언제든지 꺼내 쓸 수도 있다. CBDC도 암호화폐와 마찬가지로 블록체인이 기반 기술이다.
당초 각국의 중앙은행은 CBDC 발행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2019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페이스북이 암호화폐 ‘리브라’를 발표하면서다. 리브라는 기존 암호화폐와 다르게 기존 화폐와 일정 비율로 교환하는 ‘스테이블 코인’을 지향했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의 고유권한인 화폐 발행의 독점이 위협받게 된다. 실제 각국 중앙은행들은 리브라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페이스북 측에서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자산으로서 비트코인의 입지가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실물 결제가 허용되는 곳도 잇따라 등장하면서 사정이 변했다. 가상자산이 결제수단으로의 기능까지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가상자산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면서도 그간 추진해 왔던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도입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글로벌 기업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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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위안화 vs 달러
CBDC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 중앙은행은 지난 2019년 CBDC 발행을 공식 발표한 후 지난해부터 선전·쑤저우 등의 도시에서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선전시에 16억원 상당의 CBDC를 지급했고 12월에는 온라인 쇼핑에 사용할 수 있도록 33억원 상당의 CBDC를 추가로 배포했다.
디지털화폐 도입이 성큼 다가온 상황에서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유리한 제반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모바일 결제가 일상화해 사실상 ‘현금 없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중국의 디지털 화폐 실험에는 ‘달러 패권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과 반발 심리가 낮고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 또한 가능하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부터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위안화의 국제화를 집요하게 시도해왔다. 하지만 위안화 국제 거래는 전체 지불액의 2%에 불과하다. 38%의 달러화와 견주기에 초라한 수준. 중국 중앙은행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위안화를 도입하려는 배경에는 위안화 위상을 빨리 강화해야 한다는 중국의 야심이 자리한다. 시장에서는 중국 정부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전후로 디지털위안화를 발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우선 중국은 일대일로 경제권에서부터 디지털위안화를 결제 수단으로 활용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일대일로는 중국판 마셜플랜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경제권 발전 과정에서 중국의 뜻이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종이화폐 시장에서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만큼 차라리 사용처가 점점 늘어날 디지털화폐 시장을 선점하자는 전략이다. 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 디지털위안화 사용을 장려한 후 이를 세계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의 반격도 시작됐다. 미국 중앙은행(Fed) 역시 내부적으로 디지털달러화를 검토하고 있다. 제롬 파월 의장은 지난 2월 상원 청문회에서 “디지털달러 발행이 연준의 우선순위 사업 중 하나”라며 올해 중 디지털달러 시범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 역시 “현재 많은 미국인이 쉬운 지불 체계에 접근할 수 없는데 디지털달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중국의 디지털화폐 독주를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미다.
실제 미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이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협업해 가상 디지털화폐 개발에 들어갔다. 유럽 국가에서는 스웨덴 중앙은행이 최초로 디지털화폐인 ‘e-크로나’를 실험하고 내년에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 스웨덴은 2030년까지 종이 화폐를 없애는 게 목표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자체 ‘디지털유로화’ 발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지금까지 미국이 CBDC에 소극적이던 이유는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지위 때문”이라며 “중국이 디지털위안화로 국제화를 모색할 경우 통화의 패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어 나서게 된 것”이라 분석했다.
한국은행 또한 디지털 화폐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한다. CBDC 도입보다는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가상환경을 구축해 CBDC가 작동하는 방식과 안정성 등을 시험해볼 계획이다. 한은 관계자는 “국내 현금사용이 점차 줄어들면서 현금이 없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직 CBDC 도입을 논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미래에 대비해 장기 과제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가상자산에 미치는 영향은
올 초 BIS가 65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전 세계 인구의 5분 1을 대표하는 중앙은행들이 3년 안에 독자적인 디지털화폐를 발행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선진국 중앙은행의 20%는 단기 또는 중기적으로 디지털화폐 발행이 가능하다는 답을 내놓았다.
사정이 이렇자 CBDC가 비트코인 등 다른 가상자산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먼저 CBDC가 도입되면 현금이나 은행계좌뿐 아니라 디지털 결제 수요까지 감소시켜 가상자산의 필요성도 함께 줄어들 것이란 주장이 제기된다. CBDC 발행 시 확장성이 제한적이고 가치의 변동성이 높은 큰 가상자산의 기세가 꺾일 것으로 보는 셈이다.
현재 비트코인 가격에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돼 있는데, CBDC가 현실화한 뒤에는 매력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논리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CBDC는 쓸모없는 암호화폐를 대체하며 빠르게 보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가상자산은 태생부터 CBDC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의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주장도 적지 않다. 가상자산은 화폐라기보단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법정화폐의 디지털화 논의와 애초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금융거래를 정부가 모니터링할 수 있는 CBDC 도입 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가상자산 수요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편 CBDC가 나오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부가 인프라에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하는 만큼,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암호화폐 거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CBDC 발행 소식은 암호화폐 시장에 ‘호재’로 작용하며 비트코인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잠깐용어 CBDC
중앙은행이 전자적 형태로 발행하는 법화(法貨)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같은 정의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현재 은행 계좌에서 오가는 통화도 디지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지급결제·시장인프라위원회(CPMI)는 CBDC를 ‘전통적인 지급준비금이나 결제계좌상 예치금과는 다른 전자적 형태의 중앙은행 화폐’로 정의하고 있다.
발행주체는 중앙은행으로 전자적 형태를 갖되 법적형태는 단일·분산원장방식 기술로 구현된다. 이용주체는 모두가 이용 가능한 소액결제용(또는 일반이용형)과 은행 등 금융기관들의 자금결제용으로만 쓰이는 거액결제용(또는 거액거래형)으로 구분된다. 현재 주로 논의 중인 CBDC는 소액결제용이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7호 (2021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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