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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어쩌면 가능했을 ‘다른 삶’을 상상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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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창비|264쪽|1만4000원

친구들은 숲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숲에 갔을 수 있고, 어느 온천 도시의 호텔방에 누워 새해를 맞고 있는 ‘나’는 어쩌면 부산에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한다면, 그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솔뫼의 소설 ‘우리의 사람들’에서 작가는 그런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계속해서 환기한다.

박솔뫼의 네 번째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에서 표제작인 이 소설은 실제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가능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으로 그려낸다. 화자의 친구들은 후지산에 있는 주카이숲에 갈 것이라고 했다. 자살자가 많이 나와 유명해졌다는 그 숲에 친구들은 실제론 가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반대로 숲에 간 친구들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그들은 숲에 가서 붉은 여우를 만나고, 길을 잃은 것처럼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다. 홀로 있는 화자 역시도, 부산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살고 있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소설은 이를 “다른 세계를 생각해도 엄청난 것 대단한 것을 떠올리지 않고 같은 나라의 다른 도시의 내가 살 법한 조건들을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선택하지 않은 걸음들을 간 사람들을 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딘가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 그림자 같은 이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 그래서 소설은 마치 두 세계를 그리는 듯한데, 굳이 ‘미련’ 같은 감정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수많은 선택으로 하나의 경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그림자처럼 자연스럽지 않을까.

경향신문

<우리의 사람들>은 2009년 등단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솔뫼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작가는 독특한 상상력과 낯선 분위기로 독자들을 이끈다. ⓒ서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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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 단편소설집 ‘우리의 사람들’
2016년 후 발표한 8개의 단편 엮어

호텔에서 누워 부산의 삶 꿈꿔보고
인간이 동면을 통해 후회 덜한다는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생각들을
독창적 언어·실험적 스타일로 담아

이렇듯 상상하는 “그런 세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깊고 가볍게” 믿는 일이 이 소설 전체에 이어진다. 이어지는 단편 ‘건널목의 말’에서 말(言)과 추위를 힘겨워하는 화자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많은 말들을 땅에 묻는 것”을 상상하고, 동면을 꿈꾼다. 인간도 동물처럼 동면을 할 수 있다면 추운 계절도 견딜 수 있고, 언젠가 후회로 돌아올 수많은 말들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이초쯤 회사에 너무 가기 싫어서 눈물이 날 것 같”고 내일 아침이 밝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려봤을 생각을 소설은 묘하고 낯선 감각으로 풀어낸다.

또 다른 단편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에서 화자는 꿈속에서 부산의 어느 고택에서 열리는 전시를 본다. 전시장에는 ‘스기마쓰 성서’라고 불리는, 조선시대 말 박해받던 개신교인들이 몰래 성경을 베껴 쓴 글들을 구현한 종이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얼마 뒤 ‘나’는 출장차 부산에 가게 되고 꿈속에서 본 곳을 찾지만 당연히 그곳에 전시장은 없다. “스기마쓰 성서에 관한 것은 실제로 부산을 걷자마자 정말로 꿈속 이야기처럼 되어버렸”고, 화자는 “차라리 어디에도 가지 않고 스기마쓰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버리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성서의 이야기를 그려본다. 박솔뫼의 소설에는 여행하듯 낯선 곳을 거니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화자는 마치 전시장의 꿈처럼 나른하게 부산 곳곳을 거닌다. 뚜렷한 서사보다는 인물의 현재 의식을 따라가는 서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박솔뫼 문장 특유의 리듬감은 마치 인물의 산책에 동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마지막 수록작인 단편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보지 않았지만 가보았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곳. 이 이야기는 소설의 주요 소재인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변주되는데, 작고한 이두현 감독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는 영우는 이두현의 영화를 뒤늦게 보았지만 이전부터 보아온 것 같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두현 감독에 대해 쓴 일본인 아키비스트의 글을 몇편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이두현의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하였으나 단지 나는 당신의 글을 읽었을 뿐”이라는 소설 속 문장은 작가가 전작에서 다뤄온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인식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의 첫 소설집에 실린 단편 ‘그럼 무얼 부르지’가 “미체험 세대가 ‘광주’라는 사건에 대해 갖는 솔직한 역사적 태도”(손정수 문학평론가)를 드러낸다면, 역시 광주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5·18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프레임 바깥’의 감각으로 이를 다시 환기한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는 지난해 김유정문학상 심사평에서 “세월이 흘러 어떤 일의 ‘사건성’ 자체가 또 다른 맥락을 형성할 때, 우리는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광주’가 어느덧 그런 시간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별일 아닌 것처럼 불현듯 상기시킨다”고 썼다.

소설집에는 작가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발표한 단편 8편이 수록돼 있다. 2009년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솔뫼는 독창적인 언어와 예상을 뛰어넘는 실험적 스타일의 소설로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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