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로힝야족 문제로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출석, 집단 학살 의도를 부인해 국제적 비판을 샀던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이 귀국 후 환영을 나온 인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제공=AP·연합 |
아시아투데이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아웅 산 수 치 미얀마 국가고문이 1일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또다시 구금됐다. 1945년 생인 수 치 국가고문은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웅 산 장군의 딸이자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 민주화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고,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군부 독재를 끝냈으나 미얀마 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대학살을 외면하고 있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수 치 고문은 두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된 뒤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했다. 15살 때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퍼드대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뉴욕 유엔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72년에는 영국인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수 치 고문은 1988년 4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고국을 찾았다가 인생이 뒤바뀌었다. 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 승려들이 군정의 총칼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수 치 고문은 그 해 야당세력을 모아 민주주의민족동맹(NLD)를 창당하고 의장이 됐다. 1990년 총선에서 NLD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1988년 쿠데타로 집권하고 있던 신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수 치 고문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이후 수 치 고문은 약 15년간의 ‘창살 없는 수감생활’을 버텨야 했다. 1991년 노벨평화상도 남편과 아들들이 구금당한 수 치 고문을 대신해 수상했다.
수 치 고문은 1995년 가택연금이 해제됐으나 이후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며 재야활동을 했다. 잠시 가택연금이 해제된 시기에 해외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나 재입국이 거부될 것을 우려해 미얀마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1999년 3월 1일 남편 에어리스가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미얀마 군사정권은 수 치 고문이 영국으로 건너가 남편을 볼 수 있도록 했지만 스스로 거부했다.
88년부터 집권해 20년 넘게 선거와 의회 없이 미얀마를 통치하던 신군부는 2010년 수 치 고문을 전격 석방했다. 2012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수 치 고문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수 치 고문이 이끄는 NLD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수 치는 군부가 만든 헌법이 “외국인 배우자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고 규정한 탓에 대통령에 취임할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수 치 고문은 ‘국가 고문’에 취임, 대통령 위에서 실질적으로 미얀마를 이끌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인 수 치 고문은 자국 내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문제로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로힝야족에 대한 차별, 미얀마 군에 의한 인종청소 의혹과 난민 문제를 묵인·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제 앰네스티는 그에게 부여했던 ‘양심 대사’를 철회했고, 한국의 5·18 기념재단과 영국 에딘버러시도 각각 그에게 수여했던 광주인권상과 에딘버러 인권상을 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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