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학대아동을 위한 곳은 없다]④
20여 년 전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응급실에 한 남매가 실려왔다. 엄마는 "같이 죽으려고 약을 먹였다"고 했다. 오랫동안 배를 곯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보내는데 영 걱정이 됐다. 또 엄마가 아이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것 같아 아동학대로 신고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신고 사흘 후 조사하러 병원에 나온 경찰들은 의사에게 '역고소'를 들먹였다. 가해 부모는 "약을 먹인 게 아니라 아이들이 알아서 집어먹은 것"이라고 말을 바꿨고, 허위 신고로 고소한다며 길길이 날뛴다고 했다. 부모의 일관된 진술 때문인지 학대 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사건을 신고했던 소아과 의사 A씨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에선 가해자들이 신고자를 집요하게 찾아내 항의하는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6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현행법(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0조2항)은 어린이집이나 유·초·중·고교 교사, 의사 등 24개 직군의 아동학대 신고의무자를 지정하고 있다. 신고의무자가 아동학대를 신고하지 않을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실제 조사과정에서 신고자 신변이 노출되는 등 고발을 위축하게 하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전북 순창에서는 자신이 진료한 아동의 학대 의심사례를 신고한 공보의가 가해 부모에게 협박성 발언을 들어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일도 벌어졌다. 해당 건을 신고한 의사 B 씨는 "신고 후 한 시간 후부터 5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받았다"며 "가해 부모는 '네가 뭔데 아이 꿀밤 좀 때린 것 가지고 신고를 하느냐'며 욕설이 섞인 협박성 발언을 이어갔다"고 기억했다.
B씨의 신원을 알린 건 가해 부모를 조사한 경찰이었다. B 씨는 "가해자가 '신고자가 누구냐'고 캐묻자 조사 경찰이 '병원'이라고 알려준 게 첫번째, 뒤이어 다른 경찰이 가해자를 달래며 '의사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자'라고 말한 게 두번째 노출이었다"고 했다. 결국 B씨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지난해 제자의 학대 정황을 신고한 초등교사 C씨도 협박성 발언에 시달렸다. 피해 아동의 친모와 함께 사는 동거인은 C 교사에게 메시지로 욕설을 퍼부었다. 스스로 "폭력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며 물리력을 행사할 것처럼 굴기도 했다. C 교사는 "1년에 두어번 정도는 의심 정황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 이런 항의를 받는다"며 "신고를 하면 할수록 신고자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더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신고자에 대한 가해자의 위협은 아동학대 신고 의지를 위축시키는 분위기와 직결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신고의무자에 의한 학대 신고 비율은 2015년 29.4%(4900건)에서 2019년 23%(8836건)으로 줄었다. 2017년 기준 미국(65.7%), 호주(77%) 등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미 신고자 누설에 대한 처벌이 법으로 명시돼 있는데도 이것이 시행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배근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장은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62조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자의 신분을 누설할 시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이어 "우리나라는 아동학대 신고율이 20%대로 60%대인 미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며 "신고자 누설에 대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보니 신고 의지도 위축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민지 기자 mj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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