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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전사자'에서 '순직자' 된 5·18 계엄군 어떻게 숨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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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오인사격 원인…군인 간 총격 13명·시민군 교전 5명 등 23명 사망

연합뉴스

5.18 광주민주화운동 계엄군 장병들의 묘비명(CG)
[연합뉴스TV 제공]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들이 전사자에서 순직자로 변경되면서 이들의 사망 경위에도 관심이 쏠린다.

22일 국방부 등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 기간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은 모두 23명이다.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것은 1980년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동(진월동)에서 이뤄진 군인 간 오인 사격이었다.

24일은 광주 외곽 봉쇄지점에 있던 공수부대가 재진압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광주 비행장으로 집결하던 날이었다.

공수부대가 떠난 봉쇄지점을 인계받기 위해 20사단, 31사단,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 병력도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진월동을 통과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7공수여단 병력을 시민군으로 착각한 보병학교 교도대가 이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사격했다.

이로 인해 11공수여단 9명과 7공수여단 1명 등 10명이 사망했다.

이후 계엄군은 주변 민가에서 보복의 성격이 짙은 민간인 사살을 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부대 간 오인 사격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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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을 갖춰 이동하는 무장 계엄군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같은 날 광주 나들목(IC) 일대에서도 매복 중이던 기갑학교 교도대가 부대로 복귀 중이던 31사단 병력을 시위대로 착각하고 총격해 사병 3명이 숨졌다.

부대 간 오인 사격으로만 13명의 군인이 숨진 셈이다.

최초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는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불이 붙은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가 물러나는 과정에서 무전병이었던 병사 1명이 숨졌다.

이로 인해 최후 저지선이 뚫린 계엄군은 미리 지급된 실탄으로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를 자행했다.

5월 20일엔 시위대가 돌진한 차량에 치여 3공수여단 정모 중사가 숨지는 사건도 있었다.

시위대와 교전하다 숨진 계엄군은 5명으로 조사됐다.

5월 22일 조선대에서 주남마을로 철수하던 장교와 운전병 2명,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 중 군인 1명과 교전 지역에서 출근 중이던 방위병 1명, 광주공원 진압 작전을 하던 군인 1명 등이다.

이 외에도 7공수여단 병사 1명은 실종됐다가 적십자병원에서 시체로 발견돼 사망원인이 확인되지 않았고, 출근 중 원인불명 총기 사고로 사망한 군인도 있었다.

최후 진압 작전이 끝난 다음 날인 28일엔 9전차부대 병사 1명이 서부경찰서에서 오발 사고로 숨져 순직 처리됐다.

오발 사고로 숨진 병사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2명은 당초 순직자가 아닌 전사자로 인정됐다.

전사자는 무장 폭동이나 반란 진압을 하다 사망한 사람을 뜻한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되고 대법원이 "5·18 시위는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판결한 것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이에 국방부는 지난 18일 제24차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개최해 '5·18 계엄군 전사자' 22명의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변경하고 최초 사망 경위 문구에서 '폭도'라는 용어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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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시민궐기대회
[이창성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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