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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현장에서] 호텔 전세, 다세대 예찬…꼬여만 가는 ‘정신 승리’ 부동산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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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청년가구용 공공기숙사

전세대책 물량에 끼워 넣고

아파트만큼 좋다며 다세대 띄우기

시장은 외면 “잘하고 있다” 강변

중앙일보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호텔 전세’와 ‘호텔 거지’. 최근 등장한 신조어다. 정부가 전세난 해결을 위한 대책(지난 11·19 대책)으로 호텔 전세까지 만들겠다고 하자, 시장은 호텔 거지로 받아들였다. 해당 주택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론의 질타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호텔 전세는) 청년에게 힘 되는 주택”이라고 되받아쳤다. 김 장관은 서울 안암동의 청년주택 ‘안암생활’을 예로 들었다.

지난 1일 국토부가 이곳을 공개하자 여론은 들끓었다. “3~4인 가구가 살 곳이 못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안암생활의 정확한 프로젝트 명칭은 ‘민간매입 약정형 사회주택’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올해 초 관광호텔을 매입해 1인 특화용, 청년 가구용으로 개조해 공급했다. 건축법상 용도는 기숙사다. 기숙사는 세대수의 50% 이상이 공동 취사시설을 이용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즉 가구마다 취사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다. 애초에 취사시설이 없었던 호텔 개조의 한계다.

중앙일보

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문을 연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 복층형 모습.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관광호텔을 기숙사로 개조했다. 독신 청년 등 1인 가구에겐 좋겠지만 가족이 함께 거주할 전셋집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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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관계자는 “호텔을 일반적인 공동주택 용도로 인허가를 받으려면 주차장부터 취사시설까지 제약조건이 많다. 공사 범위도 넓어 비용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결국 호텔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기숙사나 고시원 형태로 할 수밖에 없다. 공공 지원으로 새로 단장한 시설이면서 주변 대학가 원룸보다 월세는 저렴하다. 김 장관 말대로 “청년에게는 좋은 주택”이다.

문제는 이런 ‘공공 기숙사’가 전세 대책에 포함된 점이다. 수요와 공급으로 따져도 어불성설이다. 차도 댈 수 없고 내 집에서 밥도 못해 먹는 임시 주거는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전셋집이 아니다. 전세 대책 물량에 섞지 않는 것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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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문을 연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 단층형 모습.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관광호텔을 기숙사로 개조했다. 독신 청년 등 1인 가구에겐 좋겠지만 가족이 함께 거주할 전셋집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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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입장에서도 난감하다. 안암생활은 전세 대책과 관계없이 정부의 주거복지 로드맵에 따라 청년 가구 1인 특화 주택으로 추진한 사업이다. 정부가 전세 대책에 이것저것 끌어들인 탓에 난데없이 호텔 거지의 대표 사례가 됐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질 좋은 주거환경을 원하는 국민에게 다가구·다세대 주택을 공급 카드를 내민 것도 적절치 않다. “방 세 개니 아파트만큼 좋다”(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강변이 통하지 않은 이유다. 정부는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공공 임대주택으로 공급하겠다며 중·대형 건설사의 참여를 유도하는 제도(인센티브)까지 만들었다. 앞으로 신규 아파트용 공공 택지를 공급할 때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많이 지은 건설사에 우선권이나 가점을 주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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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문을 연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 공유주방의 모습.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관광호텔을 기숙사로 개조했다. 독신 청년 등 1인 가구에겐 좋겠지만 가족이 함께 거주할 전셋집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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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부 관계자는 “중소업체보다는 큰 기업이 건물을 제대로 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주어진 정책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졸속 대책에 시장은 꼬여만 간다.

정부가 제시한 공공 임대주택 공급물량도 정확하지 않다. 정부는 11만4000가구의 전세형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추정치일 뿐이다. ‘전세형’이라는 신조어도 내놨다. 엄밀히 따지면 정부가 말하는 전세형은 전세가 아니라 보증금 비중이 80%인 반전세 또는 월세 주택이다.

정부와 부동산 시장이 소통 불가에 빠진 것은 부동산 문제에 대한 정부의 진단과 해결책이 현실과 동떨어진 탓이다. 꼬이고 꼬인 부동산 문제를 풀기 위한 첫걸음은 시장을 외면한 채 “잘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정신승리’가 아니라 정직한 소통이다.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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