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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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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유일 고려 도성서 성문 흔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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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몽골 침략 대비해 건립한 강화중성…성문 바깥에는 보도 시설 마련

몽골과 화의하면서 폐기된 것으로 추정…성벽 축조방법도 새롭게 확인

아시아경제

강화중성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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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유일의 고려 도성(한 나라의 수도 또는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 유적에서 성문 흔적이 발견됐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강화중성 서성벽 구간에서 문지(門址·문이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고 4일 전했다. 발견된 곳은 남산(해발 223m)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이다. 관계자는 “강화도성 서쪽에서 능선을 따라 도성 중심부인 현 강화읍 관청리 일대로 진입하는 교통로”라고 설명했다.


강화중성은 고려가 몽골 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강화로 천도한 뒤 건립한 세 성곽(내성·중성·외성) 가운데 하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고종 37년(12550)에 축조됐다. 둘레 2960칸에 크고 작은 성문 열일곱 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수도였던 강화를 '⊂' 형태로 둘러싼 토성(土城)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11.3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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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성 성 내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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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확인된 문지의 크기는 너비 4.4m, 길이 5.3m다. 안쪽에 성문이, 바깥쪽에 보도 시설이 설치돼 있다. 전자는 긴 사각형(장방형)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 네 개를 세워 시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자는 넓적하고 편평한 돌을 경사지게 깔아 조성했다. 문지 주변에서는 용두(龍頭·용머리 모양 장식기와) 등 장식기와와 평기와, 장식철물, 철못 등 문과 지붕 부재로 추정되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조사 당시 문지는 석축 담장에 막혀있었다. 관계자는 “성문을 허문 직후 담장을 쌓아 문지를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259년 몽골과 화의하면서 외성·내성과 함께 헐렸거나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면서 폐기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몽골은 화의의 조건으로 성곽 폐쇄를 요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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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성 성벽 판축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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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에서는 성벽 축조방법도 새롭게 확인됐다. 그간 강화중성은 판축(版築·판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흙, 모래 등을 넣어 다져 올리는 축조법)기법으로 쌓은 토루(土壘·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를 중심으로 안팎에 흙을 덧대어 축조된 것으로 파악돼왔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판축 토루만으로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관계자는 “석축 기단을 쌓고 나무 기둥을 세운 뒤 판재를 결구해 틀을 만들고 성질이 다른 흙을 여러 겹 다져 쌓았다”며 “너비 4.1~4.4m·높이 2.55m 내외로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성벽 윗면에는 나무 기둥이 세워진 지점을 따라 석렬을 일렬로 쌓았으며, 안쪽에는 너비 4.4m, 길이 3.5m 규모의 적석시설(積石施設·돌을 쌓아만든 시설)을 축조했다”며 “성벽 사면을 따라 오를 수 있는 등설시설(登城施設)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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