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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부부의 영수증] 출근하는 데만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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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청년을 위한 일자리는 없고 그나마도 만족도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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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지옥철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퇴근하며 노을 지는 바다 앞에 가만히 서면, 지친 몸과 마음이 금세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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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와 동시에 남해로 이주한 지 6개월이 지날 무렵, 남해에서 처음 일자리를 구했다. 첫 1년만큼은 하고 싶은 일만 즐기자고 생각했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 앞에 불안감은 커졌고, 특별히 소속된 곳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니 자주 무기력해졌다. 뭐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군청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다 마트에서 상품을 진열하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시급 1만원으로 최저임금보다 많은데다, 하루 4시간만 일하고 주말은 쉴 수 있으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생각보다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일터까지 차로 30분, 매일 1시간씩 출퇴근하니 유류비를 빼면 시급은 그저 최저임금 수준에 그쳤다. 4시간은 금방 지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육체적으로 상당히 힘이 들었다. 쉴 틈 없이 상자를 싣고 나르면 녹초가 돼, 퇴근하면 다른 일에는 거의 손대지 못했다. 그래도 맡은 업무만 충실히 하면 될 뿐, 일터 안에서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할 일이 없는 점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첫 월급일을 앞두고 갑작스레 일을 그만둬야 했다. 분명 공고에는 시급 1만원이라 쓰여 있었지만, 점주의 말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주휴수당을 합했을 때 시급이 얼추 1만원’이라는 것이었다. 공고를 올리고 면접까지 봤던 점주는 자신은 고용 주체가 아니라며 책임을 부인하기도 했다. 수년째 같은 방식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왔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며, 졸지에 나는 타지에서 온 유별난 사람이 돼버렸다. 정해진 날짜에 약속한 급여를 줄 것과 주휴수당 등이 기재된 급여명세서를 요구했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나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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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내에서 꽤 규모가 있는 마트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지역의 또 다른 일자리에 대한 기대가 싹 사라졌다. 듣자 하니, 사장이 친구네 부모님이거나 직원이 친한 동창의 조카인 경우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좁은 지역사회라, 불편 사항이나 문제를 공공연히 꺼내기 어렵다고 했다. 일자리가 부족한데 그나마 있는 것도 만족도가 높지 않아 청년들이 계속 타지로 나가버리니, 군청에서도 고민이 많다고 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있어도 제약 조건이 많다. 대부분 일자리가 읍내나 외곽의 관광구역에 집중돼, 차량이 없으면 일하기 쉽지 않다. 얼마 전 우리 마을에 새로 이주한 또래 친구 한 명이 다른 면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지만, 며칠 되지 않아 스스로 포기했다. 차로 30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마을에서 읍까지, 읍에서 또 카페가 있는 곳까지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면서 출근하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차를 얻어 타며 며칠 꾸역꾸역 버텨봤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시골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까. 이주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다행히 봄부터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해 당장 눈앞의 생계 문제는 해결했지만, 온종일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일하다보면 사는 곳만 서울에서 남해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생활에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도 자연을 가까이 두고서 치유받고,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온정을 느끼고, 단순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아서, 여전히 이곳에서 원하는 삶의 모양으로 살아갈 방법이 무엇일지 기꺼이 고심 중이다.

남해=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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