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불안증 환자 독백처럼 들리는 이 말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5년 차이던 1992년을 회상하며 남긴 고백이다. 1992년은 그룹 매출이 선대 이병철 회장 마지막 해 곱절로 늘어난 때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D램이 사상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잘 나가는 삼성에서 쉴새 없이 혁신을 외치는 ‘부잣집 도련님’을 이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그는 늘 답답함을 호소했다.
2002년 9월 12일 전경련회장단 월례회의 참석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에서 네번째).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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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정초. 그는 작심한 듯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론을 끄집어냈다. 같은 해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어지는 신경영 선언의 출발점으로, 그 이면에는 50세 젊은 회장 이건희의 끈질긴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회장의 위기론은 삼성이 받아든 성적표와 관계없이 늘 반복됐다. 삼성의 시가총액이 일본의 소니를 추월하고 분기당 영업이익이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한 2002년에는 “10년 뒤에 무엇을 먹고 살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반도체 시장 호황으로 사상 최대 영업실적을 기록한 2004년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지금이 진짜 위기”라는 말로 임직원들을 아연실색케하기도 했다. 2010년 경영복귀, 2013년 마하경영 등 이 회장의 위기론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회장의 청년기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영화 좋아하는 재벌 2세’ 정도로 곧잘 요약된다. 선대 이병철 회장이 향후 그룹의 ‘매스컴’ 관련 사업을 맡길 요량으로 이 회장을 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시켰을 때까지도 특유의 위기의식은 도드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맹희, 창희, 건희로 이어지는 삼형제의 후계 경쟁에서 형들을 제치고 적자로 선정된 직후 중압감은 폭증했다. 더구나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장자) 순서보다는 역시 능력순”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버지가 삼남에게 거는 기대는 워낙에 컸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유년시절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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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37세 나이로 부회장에 오른 뒤 그는 회장에 오르기까지 9년간 더 경영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유공(현 SK이노베이션) 인수에 실패하며 쓴잔을 마셨고, 알래스카 석탄사업을 비롯해 의욕적으로 뛰어든 대규모 개발사업에서 잇따라 실패하며 안팎에서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혹독한 견제에 시달렸다. 개혁과 혁신, 변화 등 안주하지 않고 줄기차게 내달려온 그의 동력 대부분은 이때부터 누적된 경험이 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호준 기자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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