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오전 6년간의 투병 끝에 사망했다. 삼성은 이날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며 “조화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나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지난 2014년 5월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져 입원한 뒤 투병해왔다.
당시 자택에서 이 회장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CPR)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 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위기상황을 넘긴 뒤 10개월간 장기 입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세에 접어들기도 했다.
지난 2017년 삼성서울병원 최고층 20층의 병실에 입원한 이 회장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청하고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는 등 호전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 회장은 어린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 등에 심취했고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이 회장은 이맹희, 창희 두 형이 잇따라 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서 삼성의 총수가 될 기회를 얻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건희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삼성그룹의 전체 경영을 맡을 사람이 없어 건희를 그룹 경영의 일선에 차츰 참여시키게 되었다. 다행히 건희가 자질도 보이고 기업 경영에 열심히 참여해 후계자로 정하게 됐다”고 썼다.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품질중시 경영’으로 대표되는 신경영,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끌었다.
지난 1995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의 ‘애니콜 화형식’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이 회장의 엄명으로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불량제품으로 판명이 난 무선전화기 15만여대를 쌓아놓고 불태워 버린 일을 말한다. 500억원 상당의 완제품이었다.
당시 무선사업부 이사였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내 혼이 들어간 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이상하게도 타고 남은 재를 불도저가 밀고 갈 때쯤 각오랄까, 결연함이 생겼다.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았고,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되자 2008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돼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이 회장이 경영을 맡은 27년의 기간 동안 삼성그룹의 매출은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 커졌다. 특히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스마트폰, 반도체, TV 부문에서 세계 시장 1위인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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