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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이건희 별세] 삼성 27년 이끌며 14조 회사 '300조 글로벌기업'으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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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78세 별세…46세에 회장 취임해 변방 전자회사를 세계 톱으로 만들어

아이뉴스24

이건희 삼성 회장이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2013년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아이뉴스24 DB]



[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이는 지난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이 회장은 46세에 회장에 취임해 27년간 삼성을 이끌며 매출 14조의 회사를 매출 300조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삼성은 이 회장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 9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1949년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재학 중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해 마산과 부산지역 초등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로 전학했다. 5학년 때인 1953년 일본 도쿄 초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 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5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1966년 동양방송의 이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1967년 결혼했다. 슬하에 재용, 부진, 서현, 고(故) 윤형 남매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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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을 맡았고,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이동해 1987년까지 재직했다.

1987년 이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으로 올라섰다. 회장이 된 뒤 이듬해에 제2창업을 선언하고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했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 200여명의 삼성 임원들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꾸라'는 자기로부터의 혁신을 강조한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다.

2008년 4월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천억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 회장은 삼성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기면서 경영에서 퇴진했다.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받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건희의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2009년 12월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만족 모르던 경영천재, '일류 주의'로 세계 최고 일궈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 그룹 회장 취임 당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건희 회장의 취임 당시 삼성그룹은 매출은 10조원이었지만 경영을 맡은 27년의 기간 동안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 늘어났다.

이건희 회장은 모두 '무모한 도전'이라 여기던 사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며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반도체가 선봉장이었다. 1974년 이 회장이 파산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국내에선 자본, 기술,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는 안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당시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일본)이어야 하겠냐"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한다. 내 사재를 보태겠다"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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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스스로 자료를 분석해 나갔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일본이 주춤거리는 사이 과감한 투자를 계속해 나갔다.

1992년 삼성은 마침내 64메가 D램을 세계최초로 만들어내면서 반도체 강자로 우뚝섰다. 1993년엔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 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탄탄대로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돼 파장은 더욱 커졌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바라보고 충격을 받았다.

위기를 감지하고 있던 이 회장은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을 전달받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천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이건희 회장은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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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꾀한 이 회장은 휴대폰으로 이른바 '애니콜' 신화를 썼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 이후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84년 모토로라 카폰이 처음 등장한 이후 국내 휴대폰 시장은 모토로라가 석권하고 있었다. 마침내 1994년 10월 삼성은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했다.

이 회장은 당시 품질경영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다. 1994년 첫 휴대전화 출시당시 불량률은 11.8%에 달했다. 당시 이 회장이 구미사업장에서 불량품 15만대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진행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1995년 8월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이 회장은 TV도 맹주 소니를 꺾고 시계 1위에 올려놓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점을 맞은 TV 시장에서 와인병을 닮은 보르도 TV를 2006년에 출시, 소니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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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갤럭시 신화를 썼다. 조세포탈 혐의로 삼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이건희 회장은 2010년 복귀, 갤럭시 시리즈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아이폰 열풍'으로 글로벌 휴대폰 시장에서 헤매던 삼성전자는 '갤럭시S'를 내놓고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갤럭시S2와 갤럭시S3가 연이은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 '갤럭시노트 시리즈'가 가세하면서 2012년 하반기 애플을 뛰어넘고 글로벌 1위로 올라섰다.

◆이건희 회장 어록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 (1987년 취임사)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의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여 오대양 육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깊이 명심해야 한다.(1988년 창립 50주년 기념식)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1993년 미국 베스트바이 방문 중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TV를 보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선언)

*"칸막이를 치지 마라"-나는 속았다. 비서실장·사장·팀장들이 모두 날 속였다. 집안에 병균이 들어왔는데도 5년, 10년간 나를 속였다. 측근들이 이 정도이니 중역들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변해야 한다. 옳은 것,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 1류의 기초다.

*"비서실은 조선 500년과 같다. 회장과의 사이에 담장이나 쌓고, 비서실은 중앙집권적 조직의 폐해를 보여줬다. 조선시대 이퇴계가 길 만들고 소 키우자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중국이 쳐들어오는 것 도와주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오그라질 피해망상과 방어의식이다.(1993년 7월 중순 오사카 회의)

*"변화를 즐겨라"-한손을 묶고 24기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해봐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 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993년 7월 중순 오사카 회의)

*21세기 우리의 기회는 세계에 있으며 초일류 기업도 진정한 국제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달성 가능한 것이다. (1996년 신년사)

*"우수한 인적 자원의 보유가 기업과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원천임을 인식하고 창의적인 핵심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에 사장단들이 직접 뛰어야 한다." (2002년 사장단 회의)

*다시 한 번 바꿔야 한다.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 하드웨어적인 프로세스와 문화는 과감하게 버리자.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을 떨쳐내자.(2014년 신년사)

◆이건희 회장 프로필

1961년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졸업

1965년 :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 졸업.

1966년 :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 MBA과정 수료, 그 후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

1978년 :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 삼성그룹 부회장 ( ~ 1987년)

1981년 : 한일 경제협회 부회장

1987년 : 삼성그룹 회장 ( ~ 2008년)

1996년 : IOC 위원

1996년 :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1998년 :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2005년 :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2008년 4월 22일 :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그룹 경영쇄신안으로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퇴진

2010년 3월 24일 :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복귀

장유미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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