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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기호의 미니픽션] 하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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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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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무렵 진만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자정이라면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초소에서 야간 취침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음성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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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아버지는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오피스텔 야간경비를 그만두고 인근 대단지 아파트로 직장을 옮긴 것은 올해 봄의 일이었다. 오피스텔보다 근무환경이 더 낫다고 해서 (오피스텔은 취침할 만한 곳이 여의치 않아 늘 책상에 엎드려 자야만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출근했는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고 한다. 계약 시 근무 기간이 6개월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 아버지가 그 부분을 염려하자 용역회사 부장이라는 사람이 귀찮다는 듯 툭 말을 건넸다고 한다. 아이 참, 그게 원래 조건이라니깐요. 웬만하면 다 연장될 거예요. 아버지는 그 말을 믿었고, 그래서 바로 서명했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경비원 자리 하나를 두고도 여러 명이 줄을 서는 상황이었다.

600세대가 조금 넘는 아파트인지라 일은 많았다. 재활용이나 음식물쓰레기 처리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미화와 조경, 택배 처리까지, 아버지는 쉴 틈 없이 일했다. 일은 고됐지만 그래도 경비초소에 에어컨도 설치되어 있어 딱히 불만은 없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자리라고, 아버지의 교대 근무자가 말했다.

문제는 지난달, 새로 입주민대표자회의 회장이 선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새 회장이 내건 공약은 현재 6명인 경비원을 4명으로 줄이겠다는 것. 그로 인해 세대마다 매달 관리비 1만5000원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 경비원은 줄지만 무인 택배 시스템과 CCTV 확충으로 입주민 불편은 최소화하겠다는 것. 그는 그 내용을 아파트 엘리베이터마다 게시했다(그 게시물 부착 또한 아버지를 포함한 2명의 경비원이 했다). 그는 압도적인 지지로 입주민대표자회의 회장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경비원들 다 문제였지 뭐…. 우리 중 2명만 자른다는 게 아니고, 전원 계약 해지하고 새로 4명을 뽑겠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와 다른 경비원들은 소속되어 있는 용역회사에 도움을 청했으나, 그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입주민 대표자에게 밉보였다간 바로 회사 자체와의 계약도 해지될 수 있으니까…. 새로 뽑힌 입주민 대표자가 워낙 이쪽 일에 훤한 사람 같아서…. 용역회사 부장은 그렇게 말을 흐렸다고 한다.

아버지와 다른 경비원들은 절망하고 체념했지만 의외의 반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입주민대표자회의에 참석했던 40대 동대표 두 명이 경비원 구조조정에 반기를 든 것이다. 관리비 조금 아끼자고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쉽게 해고하나? 경비원에 대한 갑질 문제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우리 또한 같은 일을 저지르는 거 아닌가? 이렇게 밀어붙이면 언론이나 SNS를 통해 알리겠다. 그 두 명의 동대표로 인해 경비원 구조조정에 대한 안건은 보류되었고, 아버지와 다른 경비원들은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면 잘된 거 아닌가요?”

진만이 묻자, 이번엔 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잘됐는데… 나도 그 두 분이 참 고마운데… 어제 말이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재활용장 옆에 커다란 책장을 버리겠다고 내놨거든…. 그건 따로 돈을 내고 수거해야 할 물품이어서, 그게 만이천 원인데, 내가 참 그분이 고마운 건 알겠는데, 말을 안 하고 그냥 가시길래 따로 말을 했거든. 이게 만이천 원을 내야 한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그 40대 남자가, 나를 한번 쓱 훑어보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는 거야. 마치 기분 나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부터 내가 이렇게 불안한 거야. 내가…. 내가 잘못한 거니? 그냥 내가 만이천 원을 내는 게 맞는 거니?”

아버지의 질문에 진만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가만히 핸드폰만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은 건지 쉽게 판단할 순 없었지만, 아아, 그냥 진만은 그 모든 게 까닭 없이 서글프고 수치스러웠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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