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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씨줄날줄] 탈(脫)도장/황성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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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7년 전 일본 도쿄 근무 때 살던 집은 지진에도 끄떡없는 ‘면진’(免震)식 신축 아파트였다. 모든 게 새것이었으나 딱 하나, 집 문에 달린 시건장치는 구멍에 열쇠를 넣어 잠그고 여는 구식이었다.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가방에 넣어둔 열쇠 간수에 꽤나 신경을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씩 일본의 주택 사정을 엿볼 겸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다녀봤는데 한국에선 이미 일상화한 디지털 열쇠를 달아 놓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도쿄 지사의 실내 보수를 도와준 인테리어 업자 왈 “열쇠 업계의 힘이 세기 때문일 것”이란다.

열쇠 업계 힘이 세다 한들 비밀번호나 카드 한 장으로 열리는 편리성을 이길 수는 없을 터라, 지금 새로 짓는 아파트에 디지털 열쇠가 보급되기 시작한 듯하다. 뭐 하나 바꾸려면 따지고 재고, 건너려는 돌다리를 여러 번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일본인들이 아날로그 열쇠에 안심하고 그 열쇠의 이권을 지키려는 업계도 이에 편승해 시건장치의 디지털화가 늦어진 게 아닌가 싶다. 그와 비슷한 게 도장이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제1호 정책인 ‘탈(脫)도장’이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었지만 도장을 찍으러 회사에 출근했다는 웃지 못할 일들이 속출하면서 도장이란 존재가 일본 사회의 키워드가 됐다. 스가 내각의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이 행정 절차의 90% 이상에서 도장 사용을 없앤다고 발표한 뒤 지방자치단체의 80%가 법령에 의무화한 날인을 제외한 도장 사용을 폐지하거나 폐지를 검토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만 전국인장업협회 회장이 고노 개혁상을 만나 시대의 흐름인 도장 폐지에는 찬동하면서도 “모든 도장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하니 도장문화 150년을 자랑하는 업계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스가 내각이 추진하는 디지털청이 예상대로 내년에 세워져 아날로그 일본의 디지털화를 주도할 수 있을지가 스가의 단명 여부보다 일본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새 관전 포인트다. 아베 전 정권이 양적 완화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를 성장전략으로 삼았다면 스가 정부는 “디지털화 빼고는 일본의 성장전략을 그릴 수 없다”(히라이 다쿠야 디지털개혁상)면서 디지털 혁명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도장만 없앤들 행정 디지털화의 중핵인 마이넘버카드(일본판 주민등록번호)의 보급률이 5년이 지난 지금도 17.5%에 불과한 게 문제다. 전국적인 행정전산망이 없다 보니 ‘아베 마스크’나 재난지원금 지급에 몇 개월씩 걸린 일본이다. 개인정보침해를 우려하는 일본인의 아날로그 고집이 스가 총리의 ‘개혁’에 협조할지 궁금해진다.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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