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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신율의 정치 읽기] 협박하고 달래고…김정은의 속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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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지난 10월 1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에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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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평소 폭력을 잘 휘두르는 지인을 만났다. 그 지인이 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 보이며 “네가 선빵을 날리지 않으면 나는 흉기를 사용할 생각이 없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손에 흉기를 꺼내 들었다는 사실에 비중을 두면 명백한 협박이라 판단할 것이고, 흉기보다 말의 내용에 비중을 두면 지인의 선의를 믿게 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폭력을 자주 휘둘렀던 지인이 어떤 말을 하든 이를 협박이라 받아들이지 않을까.

지난 10월 11일 새벽 북한은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북한은 여러 신형 무기를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신형 ICBM은 세계 최대 규모 도로 이동식 미사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은 북한의 신형 잠수함 탑재에 적합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이제 미국 본토를 ‘어렵지 않게’ 공격할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 군사 퍼레이드에서는 4~6연장 등 3종의 초대형 방사포, 전차포·대전차 미사일을 탑재한 스트라이커 장갑차와 신형 전차, 다기능 레이더와 미사일(TOR)을 탑재한 신형 지대공미사일 등이 공개됐다. 모두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무기다.

반면 이날 김정은 위원장 연설에서 도발적인 언급은 없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내며 하루빨리 (코로나19)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하고, 미국을 향해서도 도발적 언급을 자제했다.

이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일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화답이라 하는가 하면, 반대쪽에서는 북한 태도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북한이 공개한 신형 무기 개발을 위한 소요 시간부터 추측해보자.

개발해서 공개하기까지 최소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북한이 북미정상회담을 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분’을 과시할 당시에도 북한은 신형 ICBM과 SLBM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뿐 아니라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됐다며 북한 사절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나, 김정은 자신의 처지가 난감해져 문재인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며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때도 북한은 우리를 공격할 무기를 개발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북한은 말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와 미국을 공격할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김정은의 연설 ‘내용’에 비중을 두는 주장은 여론 호응을 얻기 힘들다.
국책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지난 6월 25일 발표한 ‘통일의식조사 2020’을 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89.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북한에 의한 대한민국 공무원의 피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시각도 마찬가지다. KBS가 여론조사 전문업체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 동안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3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 대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68.6%)가 긍정적인 평가(21.8%)를 무려 세 배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공식 입장 역시 우리 국민의 생각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신형 ICBM과 자체 개발한 트럭 발사대(이동식 발사대)가 공개된 북한의 미사일 열병식에 대해 트럼프가 크게 화를 냈다고 가까운 소식통이 전했다”고 한다.

이번 김정은 위원장 행위를 전략적으로 분석해보면, 미국 대선을 앞두고 일종의 ‘양다리’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트럼프와 바이든 두 후보에게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양다리’라 한 이유가 있다. 신형 전략 무기를 공개함으로써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보여줘 바이든 후보 측에 불리하지 않은 여건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미국에 대한 호전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신형 ICBM 발사 등의 직접적인 도발을 자제함으로써 향후 트럼프 측에 ‘봐줬다’는 주장을 하며 협상 과정에서 대선 관련 ‘채무’를 받아내려는 전략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북한은 미국 대선 직후 언제나 도발 강도를 높여 긴장 국면을 조성했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이 되든, 바이든 후보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북한은 도발 강도를 매우 높일 가능성이 크다. 대선 이후 등장할 미국 행정부와의 기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미국 대선 이후 북한이 가장 먼저 행할 도발은 신형 ICBM 발사일 것이다. 혹자는 이런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 종전 선언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 수도 있다. 물론 종전 선언이 긴장 완화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종전 선언과 종전 협정은 다르다. 종전 협정은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지만, 종전 선언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 단지 정치적 선언일 뿐이다. 종전 선언은 ‘부담감’이 없기 때문에 북한이 종전 선언 제안에 호의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반대로 아무런 구속력도 없고 전략에 이득이 될 것도 없는 선언에 동참했다가, 대선 이후 미국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오히려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북한은 생각할 수도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이 확실해진 이후 본격적인 대미 전략을 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면 북한은 민주당 정권과 새로운 협상을 해야 할 처지다. 바이든 후보가 전통적인 민주당 대북 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계승할 경우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도발 이외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첫 번째 임기처럼 북한과의 외교적 성과에 매달릴 이유가 적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북한이 우리에게 호의적 제스처를 취한 이유도 미국 대선이라는 불확실성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정세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서울을 통해 워싱턴에 선을 댈 상황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서, 우리에게 ‘언어적 호의’를 표명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북한의 이런 긍정적 언급을 종전 선언 제안에 대한 호응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협박과 달래기를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평화의 당사자는 우리 국민이다. 한반도 평화가 깨졌을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존재는 우리 국민이다. 때문에 정부의 평화를 위한 노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동의다.

국민 판단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객관적 판단을 하고 있는 우리 국민은 설득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황의 객관적 판단과 이를 토대로 한 현실적 대응이다.

매경이코노미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0호 (2020.10.21~10.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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