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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콩트_봉고 타고 빙고 하며 귀성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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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차별금지법을 이 땅에]“차별 심하다” “역차별이 문제다” 김씨네 가족이 차별 항목 빙고 하며 버스 타고 귀성한 썰

한겨레21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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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찾아갔다 조상 따라간다. 이번 추석엔 오지 마.” 연휴 첫날 김별(28·인턴사원)은 할머니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오호호호,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사라면 목숨 거는 집안에서 이런 일이. “정은경 선생님이… 안 오는 게 효도란다.” 요즘 할머니가 가장 믿는 분의 설득 덕분이다. 물론 할머니를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꽉 막힌 고속도로, 친척들의 잔소리, 끝없는 부엌일, 얄미운 남자 식구들… 이런 지옥의 풍경을 쉬어갈 수 있다니, 어깨춤이 저절로 나왔다.

김별은 해방의 첫날을 기뻐하며 치킨을 주문하고 드라마 정주행을 위해 리모컨을 들었다. 딩동! 치킨이 벌써 왔나? “누구세요?” “김별씨!” 반사적으로 문을 연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소독약을 뿌리며 들이닥쳤고, 장난감같이 생긴 총으로 하얀 총알을 쏘았다. 총알은 거미줄 같은 마스크로 바뀌어 입을 막았다.

정신을 차린 김별은 미니버스 안에 이상한 색동옷을 입고 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뭐지? 내가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이라도 했나? 그런데 한 칸씩 떨어져 앉은 사람들 모두 익숙한 곱슬머리였다. 조수석의 곱슬머리가 뒤돌아보았다. 김차(32·의사)였다. “오빠야, 이게 뭐고?” “뭐긴? 귀성 버스지.” “할머니가 오지 말랬는데?” “말이 그렇지, 제사를 어떻게 빠뜨리노? 아버지 지시로 내가 특별히 만든 방호 차량, 방호 한복, 특수 마스크니 안전은 염려 마셔.” 김별은 그제야 자기가 입은 게 방호복과 한복을 결합한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운전석에 앉은 올케 고방울(31·한복디자이너)이 손을 흔들었다. “고모가 좋아하는 무지개떡 색이에요.”

“고모.” 뒷자리에서 핑크 한복의 김송(5)이 튀어나왔다. 이쁜 조카를 보니 마음이 좀 풀렸다. 송이가 뭔가 내밀었다. “고모집에서 이거 가져왔는데 괜찮지?” 아차! 무슨 캠페인을 하는 친구가 놔두고 간 종이 모형 버스였다. 김차가 끼어들었다. “뭐꼬, 이건?” 버스 옆의 글씨를 읽었다. “차별금지법 제정? 평등버스? 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이런 짓 하나?” 김별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뭐든 넘겨짚고 무시해온 오빠의 얄미운 표정을 견딜 수 없었다. “내 정신이 어때서? 세상 차별 좀 없애자는데.” “우리나라처럼 차별 없는 데가 어딨어? 오히려 역차별이 문제지.”

둘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버스는 경기도 수원의 대학교 앞에 섰다. 불쑥 셀카봉부터 들어왔다. “저는 지금 귀성용 방호 차량에 타고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분들이 우리 김씨 가족! 저~언부 곱슬머립니다.” 남동생 김무(24·대학생). 전공은 제쳐두고 유튜버를 한다더니, 오늘 같은 날 에스엔에스(SNS) 라이브를 한다고.

김무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아하, 누나는 우리나라 사람들 차별이 심하다, 법을 만들어서라도 막아야 한다. 형은 그거 다 헛소리다, 이런 거군요.” 김별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누나, 그 법이 막자는 차별이 어떤 것들이야?” “마, 많지. 성별, 장애, 나이, 언어… 그런 걸 다 막자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고….” 친구가 말한 걸 더듬더듬 떠올렸다. “아, SNS 댓글로 알려주시네요. 모두 23개 항목이라고.” 김차가 말했다. “뭐가 23개나 돼? 뭐든 갖다붙였구먼.”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좋아요. 싸우지 마시고요. 이럴 때 우리 집안은 게임으로 승부를 가립니다. 차별금지법에서 말하는 내용으로 빙고판을 만듭시다. 그리고 우리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중 두 줄을 완성하면 누나의 승리, 못하면 형의 승리. 어때요?” “콜!” 김차가 먼저, 그리고 김별이 받았다. “콜!”

빙고의 처음과 마지막은 비우고, 나머지 23개를 적었다. 김별. “먼저 한 칸 지우고 시작하자. 성별 차별은 인정하지?” 김차. “뭔 소리야? 요즘 여자들, 얼마나 편해졌어? 그리고 우리 집은 완전 평등이야. 안 그렇소, 부인? 보통 남자들은 운전대 안 넘기는데, 나는 그냥 넘겼잖아.” 고방울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지금 당신 집 아니고, 우리 집으로 가도 되면 인정.” 그러면서 창밖의 대형 광고판을 가리켰다.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문구 아래 여자는 부엌일하고 남자는 차례상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김무가 말했다. “내도 하나 지우고 싶은 거 있다. 출신 지역. 저번에 알바 구하는데 사투리 쓴다고 안 된다 카더라.” 김차. “뭔 알반데?” “레스토랑 서빙.” “사투리 쓰고 그러면 신뢰가 떨어지긴 하지.” 김별. “오빠도 지방에서 왔다고 병원에서 안 좋은 업무만 준다며?” “그건 출신지 때문이 아니라, 지방대 나와서 그런 거야.” “오호라 실토하네. 그건 학력에 따른 차별이야. 바로 그런 거야.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차별을 막자는 거야.”

버스가 국도를 달리는데, 눈앞에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다. 휠체어를 탄 여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버스를 추격하고 있었다. 김무가 차를 휠체어 옆으로 붙여달라고 하고선 무슨 일이냐 물었다. “허, 헉. 휠체어 실어주는 버스가 없… 화가 나서 내 힘으로 가려… 허, 헉. 힘든데 말 시키지….” 고방울이 김차를 힐끗 봤고, 김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세우더니 미니버스 뒤에 장치된 휠체어용 경사로를 내려 휠체어를 탄 여성을 태워줬다.

김차가 멋쩍은 듯 말했다. “어머니 다리가 안 좋잖아. 언제 휠체어 탈지 몰라 대비해놓은 거다.” 김무가 말했다. “이런 건 사실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해줘야 하는데.” 휠체어를 탄 여성이 말했다. “장애인 고속버스도 2006년에 법을 만들어 2019년 말에 처음 생겼어요.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법을 만들면 그걸 지키게 하라고 싸울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면서 근육질의 팔을 흔들었다. 그 여성을 내려준 뒤, 김차가 빙고 게임판의 장애에 자진해서 체크했다.

버스가 다시 속도를 내서 달렸다. 김별은 깜빡 졸았다가 급정거 소리에 놀라 깼다. 고방울이 차에서 내렸다. 가벼운 접촉 사고 같은데 승강이가 길어졌다. 김차와 김무가 내렸고, 잠시 뒤 모두 차로 돌아왔다. 고방울이 얼굴이 벌게져 말했다. “고모, 송이 귀 좀 막아줘요.” 막았다. “아, 정말! 상대 운전자도 그렇고, 경찰도 그렇고… 내가 나가니까 무조건 덮어씌우더니, 남자 둘이 나오니까 태도 바뀌는 거 봤지?” 김차. “그런 거 아니야. 오버하지 마.” “뭐, 오버?” 김무. “형, 내가 경찰이 무전하는 거 몰래 촬영했거든 들어봐.” 치이익 소리가 나고선 경찰 목소리가 들렸다. “아줌마가 몸이 작아서 실수한 것 같아. 팔다리가 짧으면 빨리 대처가 안 되잖아…. 난 처음엔 피부가 까매서 다른 나라 사람인가 했네.”

으아악! 고방울이 괴성을 지르며 빙고판을 찾았다. “뭐 아줌마? 팔다리? 피부가 까매서? 이런 건 뭐 해당하는 거 없어?” 김별이 나이, 피부색, 출신 국가 등을 찾아주며 말했다. “이번 차별금지법이 ‘포괄적’이라는 게, 그런 의미도 있대요. 이렇게 복합적 차별이 잘 일어나서.” 김차가 제 딴에 위로랍시고 말했다. “대놓고 말한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고방울이 발끈했다. “경찰이 그러면 안 되지. 공적인 일에서!” 김별이 말했다. “맞아요. 차별금지법에 걸리는 영역이 그런 거예요. 행정서비스, 고용, 재화의 공급, 교육훈련 같은 것….” 고방울이 말했다. “그럼, 저런 경찰 바로 징계 때릴 수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요. 시정 권고를 하고… 그래도 안 고치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너무 늦잖아요. 그래서 법이 힘이 있겠어요?” “그래도 대부분 시정 조치 단계에서 처리된대요. 만약 악의적이고 반복적이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고요.” 김무가 말했다. “미국 경찰이 흑인 용의자를 폭력적으로 다루다 죽이고… 그런 것도 차별이 공공 영역에서 일어나면 생기는 일이겠네요.”

싸늘한 분위기 속에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러다 송이가 손을 번쩍 들며 ‘화장실!’ 했다. 휴게소에 들러 모두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팻말과 펼침막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가정 파괴, 동성애 독재. 차별금지법 결사반대] 양복 입은 장년의 남자가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자 송이가 외쳤다. “엄마, 저 사람 뉴스에 나오는 목사님 닮았어. 광화문에서 코로나 퍼뜨린.” 고방울이 얼른 입을 막았다. “아니야. 그 사람은 감옥에 들어갔어.” 김무가 말했다. “닮기는 엄청 닮았네. 마스크 턱에 걸친 것도 그렇고.”

목사가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면 동성애 반대를 말하는 목사를 경찰이 잡아갈 겁니다. 성전환 수술 안 한 남자 트랜스젠더가 여탕에 가도 막지를 못하고요.” 고방울이 김차에게 말했다. “이야, 당신 우군 나타났네.” 김차. “저 사람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는 건 아닌데, 사람들이 걱정할 수밖에 없어. 만약 송이가 외국 남자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는데, 내가 반대하면… 그럼 차별금지법으로 잡아갈 거야?” 송이가 말했다. “아빠, 맞아. 나 알라딘하고 결혼할 건데, 반대하면 잡혀가.” 김별이 가슴을 쳤다. “아니야. 사적 영역에서 성적 지향, 성정체성에 관해서도 차별 발언을 한다고 처벌하지 않아. 취업 절차, 행정 업무 같은 데서 차별이 일어나야 조처해.” 김무가 스마트폰을 보며 말했다. “댓글창에도 논쟁이 뜨거워. 그런데 다수 의견이 뭔지 알아?” “뭔데?” “저 목사, 마스크 좀 씌우래.” 김무가 특수총을 쏘았다. 철컥, 거미줄 마스크가 채워지자 목사는 ‘읍읍’ 하며 버둥댔다. 지지자들이 놀라며 김씨 가족에게 달려들었다. 가족은 미니버스를 타고 달렸다.

드디어 부모님의 과수원에 도착했다. 아버지 김법(60·농업)은 휴일인데도 사과를 상자에 담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과수원 언덕 위로 외국인 노동자들도 보였다. “할아버지!” 송이를 선두로 가족이 달려오자, 김법은 멈추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뒤돌아서 울타리를 단단히 치며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일 마치고 방 안에 들어가. 나오면 안 돼.” 김차가 물었다. “쟤들 혹시 코로나?” 김법이 말했다. “그런 건 아이고, 요새 외국 애들 밖에 돌아다니마 사람들이 뭐라 칸다. 그래서 연휴엔 아예 밖에 못 나가게 하려고.” 김무가 구시렁댔다. “아이고, 감금 노예네.” “시끄럽다!” 김법이 말을 끊었다.

“막내, 니는 머리랑 옷차림이 뭐꼬? 니 인터넷에 친구 사진 보니까, 여장하는 머스마들도 있던데.” “그거 그냥 만화 캐릭터 흉내 낸 건데요.” 김법이 이번엔 김별에게 화살을 돌렸다. “니는 내가 지난 설에 말한 걸 하나도 해결 못했재? 정규직 구하든지, 신랑이랑 손잡고 손주 델꼬 오든지. 응?” 김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곤 혼잣말을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말이 툭 내뱉어졌다. “전국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어. 우리 아버지가 차별 빙고판이야.” “뭐라고? 차아- 벼얼-?” 김별은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다. “아버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은 말이죠. 고용 형태, 혼인 여부, 임신과 출산, 가족 및 가구 형태, 국적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드아아!!” 그러곤 거미 마스크 총을 아버지에게 겨눴다. 탕!

크고 둥근 달이 동산 위로 떠올랐다. 김씨네 일가족은 선산 밑 금잔디 마당에 모였지만, 얼굴이 벌게지고 곱슬머리가 용수철처럼 삐져나온 채, 서로 멀찍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할머니 노영심(82·금촌리 한글교실 새싹반)이 나타났다. 김법이 말했다. “모두 어머니께 절을 올리자.” 노영심이 팔을 휘저었다. “내 올해는 너희의 절을 받을 수가 없구나. 하루 종일 너희가 다투는 꼴을 라이브 방송으로 다 보았느니라.” 김차가 김별을 노려봤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노영심이 말했다. “그 빙고판인가 하는 걸 가져와보거라.” 김무가 빙고판을 건넸다. 노영심이 빙고판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범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뭐냐?” 김법이 주춤주춤 말했다. “심청전입니다.” “그중에서?” “심 봉사 눈 뜨는 장면입니다.” “내가 보니 차별금지법이란 게,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려는 법인 것 같구나. 아범아, 저 아이들을 낳았을 때 차별 없이 지내라고 차/별/무(無)라는 이름을 주지 않았느냐? 너희 부모가 못 배웠다고 괄시당하고, 네가 사우디에서 외국인이라 무시당하고, 애들 엄마가 다리를 전다 놀림받고… 그런 꼴 겪지 말라고.” 세 남매는 놀랐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김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야, 우리 애들은 차별당하지 말라고….” 노영심이 말했다. “차별당하는 사람은 알아도, 차별하는 사람은 잘 몰라. 나도 심학규를 봉사·장님·맹인이라 불렀는데, 그게 시각장애인을 무시하는 말이라는구나. 이렇게 모르는 일을 법으로 정해 알려주자. 그게 바로 이 법을 만들자는 사람의 생각 같구나. 별아, 맞느냐?”

김별은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송이가 “보름달!” 하며 따라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식구들이 하나둘, 마지막엔 김법까지 동그라미를 그렸다. 노영심은 여든 넘어 배운 한글로 비어 있는 두 칸에 ‘모든’ ‘차별’이라 썼다. 그러곤 종이를 불에 태워 하늘로 날렸다. 농장의 노동자들까지 불러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강강술래를 했다. 올해의 달은 무지개색으로 빛났다고 하더라.

이명석 저술업자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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