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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코로나, 넌 내게 분노를 안겨줬어’ [김기자와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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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취준생의 ‘코로나 레드’ 어려움 토로 / 올해를 생각하면 괜히 억울함만 / 정신건강상담에서 다행히 위로 얻어

세계일보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아, 뭐야. 또 취소됐어?’

20대 취업 준비생 A씨는 지난 3월 ‘토익(TOEIC)’ 시험의 취소 소식을 거듭 접하고는 부아가 치밀었다. 몇 달이나 준비했는데 한 차례 시험이 취소되더니, 다음 회차 응시를 앞두고 같은 일이 또 벌어진 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시험 취소 이유였는데, 나중에 시험접수가 진행됐을 때는 앞서 시험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몰리는 바람에 결국 접수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A씨는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썩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여러 일정의 차질로 올해를 기억할 것 같다고 말했다. 대개 한 해가 저물면 기분 좋았던 일이 하나쯤은 생각나기 마련인데, 아직은 딱히 그럴 게 없다면서다.

A씨는 자신이 ‘코로나 레드’를 앓는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와 달리 ‘코로나 레드’는 코로나19 장기전에 따른 스트레스 증가로 ‘분노’가 일어나는 증상을 의미한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코로나 레드’ 검색량은 지난 8월말부터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기약 없이 채용공고를 기다리거나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 갈 때 이러한 감정이 고조된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다소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면 알게 모르게 억울하기까지 하다는 거다.

취업을 준비 중인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에게서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A씨는 밝혔다. 분노를 달래려 서로에게 위로를 보내지만 찰나의 해소일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그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실을 논하고 분노해봤자 도리어 상대방에게 짐만 지우는 것 같아 길게 말도 안 한다고 한다.

홀로 하는 명상이 그나마 마음을 다스리는데 위안이다. A씨는 “사람들이 많은 휘트니스 클럽 같은 곳에 가기가 어려우니 홈트레이닝을 주로 한다”며 “운동을 하면 잡념이 사라져서 괜찮다”고 말했다.

A씨는 비대면 상담전화도 이용했다. 여러 고민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날, 꼬박 밤을 새우고 정신건강상담 핫라인(1577-0199)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비대면이라 툭 터놓고 말하기 편하고, 친절한 상담으로 위로를 받았다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추천했다.

A씨는 코로나 레드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사회의 분위기가 개인 구성원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속적인 경기 침체와 줄어든 사람간의 교류, 여가생활 감소 등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며 “분노는 이따금 범죄로 이어지지 않느냐”고 말했다.

부산의 한 여중생이 엄마를 ‘자가격리 위반’으로 경찰에 신고한 게 이러한 증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함께 자가격리 중이던 엄마가 자신과 말다툼을 하고 집을 나서자, 경찰에 엄마가 자가격리를 위반했다며 신고한 거다. 부산시가 엄마를 계도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하마터면 가족간의 다툼 때문에 딸의 신고로 엄마가 형사처벌을 받을 뻔했다.

한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분노조절장애 진료자는 총 2249명으로 2015년의 1721명보다 30%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는 6월까지만 집계했는데도 지난해의 절반을 넘는 1389명이 분노조절장애 진료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를 두고 최 의원은 “올해는 코로나19 장기전에 따른 분노와 스트레스 증가로 ‘코로나 레드’가 번지고 있다”며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가의 진료를 통한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며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분노조절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을 위한 정신건강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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