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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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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왕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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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부터 '세종대왕의 왕자들' 온라인 전시
한국일보

문종이 발명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 측우기.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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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네번째 왕이었던 세종은 한글 창제 등 불멸의 업적으로 '대왕'이라 불리지만, 한편으론 다산(多産)의 왕이기도 했다. 소헌왕후 사이에서만 8남 2녀를 뒀고, 후궁이었던 5명의 빈 사이에서 낳은 자식까지 더하면 모두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남겼다. 많은 후손은 탄탄한 왕권의 과시이기도 했다. 다른 왕자들과 달리 세종의 왕자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 중 유명한 이들은 문종,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꼽을 수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24일 추석 연휴를 맞아 이들 네 명의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획전시 '세종대왕의 왕자들'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사태를 감안, 29일부터 두 달간 궁능유적본부와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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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어진초본. 잔혹했던 행적과 달리 세조의 얼굴은 온화해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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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세자 때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흔히 장영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료에는 문종이 발명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1441년(세종 23년) 제작된 측우기는 유럽보다도 역사가 200년 가량 빠른, 조선 과학 기술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둘째 아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야심가 '수양대군'으로 더 유명하다. 이런 배경 탓에 세조는 잔혹한 왕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세조어진초본'을 보면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 "왕이 될 상"치곤 온화한 분위기에 부드러운 얼굴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어진 다수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로 소실됐는데, 세조 어진만큼은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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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의 친필 목각본 병풍. 안평대군은 시화에 능한 명필이었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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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음악을 사랑했던 셋째 안평대군은 당대의 명필이었다. 그는 중국 원나라 조맹부(1254~1322)의 글씨인 ‘송설체(松雪體)’를 연구, 조선에 널리 유행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병풍에서 빛을 발한다. 글자가 길고 부드러운 '원필(圓筆)'로 쓴 이백의 오언율시 등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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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실기엔 비극적이었던 금성대군의 일대기와 공적이 쓰여 있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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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조카 단종이 폐위되자 사육신과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다가 발각돼 사약을 받은 비운의 왕족이다. 1858년 제작돼 금성대군의 공적을 기록한 목활자본 '금성대군실기'가 남아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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