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결혼 기회 잃고 고립된 일상 악순환, 어느덧 노년기 맞아
구속부상자회 "국가가 명예회복 배상해야…망언 세력 처벌도"
국립 5·18민주묘지 |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약관의 나이에 '폭도'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청년은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홀짝이는 술이 고문 후유증까지 얻은 육신과 정신을 달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사회의 일원으로 제 몫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정마저 꾸리지 못하면서 숨어지내듯 고립된 일상이 악순환처럼 반복했다.
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문턱에 접어든 삶에 더는 미련이 없어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다.
1일 5·18구속부상자회에 따르면 판박이처럼 비슷한 생을 살아온 회원이 올해만 4명이나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끝낸 동지들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더는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광주 광산구 한 영구임대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된 5·18유공자 A(60)씨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구속부상자회원들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남겼다.
A씨는 40년 전인 스무살 5월 당시 소요죄 혐의로 연행, 구금돼 군사재판을 받은 기록이 남아 1993년 5·18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웃과 사회복지사는 물론 전남에 사는 가족과도 별다른 왕래 없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로 생계를 꾸렸다.
매해 5월 18일이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 이후에도 A씨는 20여년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우울증을 호소한 A씨가 이날 지인과 전화 통화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더는 삶에 미련이 없다"였다.
A씨는 5·18유공자로 인정받으며 지급받았던 일시 보상금을 아끼고 쟁여놨다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행의 여비로 썼다.
그는 지인과의 통화에서 "평생 여행을 못 해봤는데 6개월간 원 없이 돌아다니고 구경했다"는 말을 함께 남겼다.
5·18단체는 A씨를 포함한 유공자에게 지급된 일시 보상금이 산업재해에 준한 계산법으로 55세까지의 노동력만 산출한다고 설명했다.
워낙 가난했던 살림에 비하면 큰돈이지만, 새롭게 삶을 꾸릴 희망을 안겨주는 금액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5·18단체는 강조했다.
문 회장은 "국가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배상으로써 5·18 유공자의 피해를 복구하고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자 보상이라는 말장난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문제를 바로잡고 5·18 유공자가 민주유공자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도록 한 법안을 국회가 원안대로 입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빈(광주 광산갑) 의원이 지난달 대표 발의한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유공자에게 연금 형태로 보훈지원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18단체는 유공자의 고단한 삶을 달랠 또 하나의 방안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도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문 대표는 "5월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하고 괴물집단이니 가짜네 하는 망언을 쏟아내는 세력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h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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