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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A씨, 당당하셔요[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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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A씨. 힘내세요. 그 누구도 당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런 뻔뻔한 자들이 있다면 저부터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서서 막아내겠습니다.

법적으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길은 막혔습니다. 자초지종이 제대로 드러날지도,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을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영원히 A씨로 남게 될 듯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우리이니 앞으로도 서로 알게 될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어제 밤새도록 당신이 생각나서 못 잤습니다.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이 지면을 훔쳐서라도, 당신께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1993년에 제가 다니던 학교의 화학과에서 교수에 의한 조교 성희롱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대학원 신문 편집장이었던지라 그 여성 조교와 함께 싸우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회적 장벽은 높고 두꺼웠습니다. 사연을 충분히 설명하고 지지와 협조를 부탁할 때마다 돌아오는 이야기는 무관심과 묵살, 혹은 ‘강간을 한 것도 아닌데 웬 미친 인간 하나가 난리를 피우냐’는 조롱이었습니다. 절망 끝에 반쯤 미친 상태가 된 제가 자연대 행정실로 쳐들어가서 1시간 넘게 난동을 부렸고, 그 덕인지 학교 측이 반응했습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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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담당이자 종교계와 ‘시민사회’에서 높게 존경받던 교수 한 분이 조용히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최고의 목적’이라는 칸트의 윤리학을 일생 공부하셨고 향기로운 말씀으로 보수 진보를 통틀어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니,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 주시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30분 남짓한 회견 시간에 반복한 이야기는 딱 하나였습니다.

‘그런 따위의 일로 우리 대학교의 초대 민선 총장을 이렇게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자네 때문에 우리 학교가 뒤숭숭하지 않은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토악질을 한 게 그때 처음입니다. 당신들 중장년 남자들이 만든 학교가 뭐고 학문이 뭐고 도덕과 권위가 무엇이길래, 그래 그게 도대체 뭐길래, 한 사람의 내장을 휘젓고 찢어놓는 피울음 소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냐. 권력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진실이고 고통이고 나발이고 다 한통속이구나. 결국 이 싸움은 학교 밖으로, 즉 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법적 싸움은 쉽지 않았습니다. ‘sexual harassment(성희롱)’라는 미국 판례 용어의 한국말 번역어조차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때 몇 분 변호사들이 나섰습니다. 세 분의 고마운 인권 변호사였습니다. 그분들 덕분으로 이 싸움이 법정으로 갔으며 결국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A씨. 사람은 변합니다. 세상도 변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으며, 절대로 침몰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별의별 일과 말들이 당신을 덮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절대로 당신 혼자의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 모두 어제 한잠도 못 잤습니다.

그래도 차마 친구에게도 형제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말 못할 일들 때문에 힘드시겠죠. 일생 내내 한밤중에 일어나 오래오래 울며 지새우는 밤들이 앞으로도 많으시겠죠.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듣지 않게 흐느끼시겠죠. 죄송합니다.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함께하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함께 방패가 되고 거북이 껍질이 되어 당신을 막아내겠습니다.

1993년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강간’이 아니더라도 ‘성희롱·성폭력’은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지난 30년간 비록 아주 더디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를 박아 왔습니다. 심지어 그때 제게 훈계를 늘어놓던 그 ‘윤리학’ 교수조차 지금은 자기가 당시에 뱉어냈던 말을 창피하게 부인하는 판이니까요.

이러한 진보가 벌어지는 과정에 여러 일들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혼란의 책임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 명입니다. 벌어지는 일들을 수습하는 것은 사회의 몫입니다. 개개인이 뒤집어쓸 몫이 아닙니다. 문제는 진실입니다. 진실이 진실대로 살아나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리고 진실의 진보가 앞으로 나가면 풀 죽었던 희망을 잃었던 모든 사람들이 힘을 얻고 진실을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서울시민들이 꿈꾸는 진보의 희망이 그런 겁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고 어쩌면 가상의 인물일지도 모르는 A씨. 고맙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하셨습니다. 당당하세요. 김남주 시인의 말씀대로, ‘달리 말하는 놈들이 있으면 그놈 주둥이부터 호미로 찍어’ 버리겠습니다.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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